사람들은 술을 마사면 갖가지 모습을 보인다.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거나, 슬피 울거나, 광언狂人이 되어 남과 시비를 즐기거나 하는 따위의 모습으로 술을 마신 반응을 보인다. 술을 마신 사람의 반응이 천차만별인 것은 본디 그 사람의 본성이 그렇다기보다는 술로 인하여 자기 제어 기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의 법난을 술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집에 유가需家와 불가佛家가 초대되어 술자리를 벌였다. 그런데 불가쪽에서 술을 과하게 마셔 이성을 잃고 주정을 부리자 유가는 술에 취한 불가를 보고 처음에는 “주도가 없다, 술버릇이 고약하다”는 따위의 비난을 하다가 불가의 술주정이 조금 더 심해지자 “불가의 본성이 본디 나쁘다”는 식으로 비난을 가한다. 그러다가 유가는 불가의 본성이 매우 고약하니 매로 다스려야 한다면서 불가에게 몰매를 가하여 내쫓아 버리고는 유가끼리의 술자리를 벌인다. 결국 같은 유가끼리 술판을 벌이면서 서로의 주도가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다투게 된 것이 조선의 법난 발생과 유가의 행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는 한반도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이미 중국에서 비슷하게 벌어진 일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역사의식이 필요함을 새삼 느낀다.
인도에서 육로와 뱃길을 통해 중국에 수입된 불교는 초기에는 널리 퍼져 있는 유교, 도교(老莊)와 서로의 유사성을 교류하며 중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초창기 중국 불교는 중국 사회 밑바탕에 깔려 있는 노장 사상과 교류를 통해 중국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에 차츰 영향을 끼쳤으나 부분적으로는 불교가 노장사상에 흡수되어 가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로부터 계속적인 불교의 인적, 물적 자원이 전해지면서 불교는 중국사회에서 노장의 도교 위치를 위협하며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런데 이에 따른 반대급부로 노장 사장가들로부터 교리와 풍속에 관한 중국의 전통 사상과 배치되는 부분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받는다. 여기에서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인의 전통과 접목되면서 다양한 이론서들이 인도에서 전래된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언眞言인 양 위조되어 유포되었다. 이를 통해 노장 사상가들과의 사상 투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노력들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격의불교格義佛敎 시대를 지나게 된다.
후한 명제 영평 10년(67)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뒤로 서기 446년 북위 태무제에 의한 법난이 발생하기 전까지 중국 불교는 인도에서 수입한 불경의 번역과 이를 토대로 한 주석서의 간행, 불장과 사원, 불탑의 건립과 신앙, 초기화된 종단의 건설 등이 휠발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이 무렵 중국의 사회 상황을 보면 후한 명제와 장제 시대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유학을 존중하고 정무에 힘썼으나, 제4대 화제가 즉위하면서 외척과 환관에 의한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고 갖가지 천재지변과 황건의 난동으로 후한은 멸망을 하고 중국 대륙은 분열과 혼란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삼국분열 시대와 비한족 계열의 민족이 중국대륙을 점거하는 비운을 맞는다.
일세기 중엽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혼돈과 파괴의 세월을 지나면서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화라는 과정을 거치지만, 이 과정 또한 힘겨운 도전과 응전의 시간을 거치는 바람에 많은 부분이 인도불교와는 다르게 변질되어 간다.
중국 불교가 초기에는 중국 전래 사장과 풍속 동의 차이로 말미암아 사상 투쟁이 전개되지만, 이와는 별도로 왕조의 후원 속에서 중국사회에 중추적인 종교로 자리잡아짐에 따라 타락의 늪으로 빠져 드는 모습을 보인다.
446년 북위 태무제에 의한 법난이 일어나기 전의 북위 불교의 부패된 상황을 보면, 439년 북위의 군대가 북량北凉을 침략했을때 북량의 승려들이 북위의 군대와 대항하여 싸우다 삼천 여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일부 사원에서는 다량의 무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또 태무제가 사원 토지에 대한 정밀 조사를 실시해 장안의 부유한 집안과 절에서는 그 해 저장해 놓은 다량의 술통과 승려들이 그 안에서 살며 귀족의 부녀자들과 방탕하게 즐기던 지하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를 빌미로 최호와 같은 유자儒者는 전국의 승려를 모두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태무제는 이를 받아들여 전국의 모든 탑과 불교 경전을 파괴하고 불지르고, 사문들을 땅에 묻어 처형할 것을 칙령으로 반포했다.
태무제의 폐불은 앞에서 밝힌 당시 불교계의 타락과 북위에 대항하는 북량의 저항세력과 불교와의 결탁 외에도 태무제가 어려서부터 도교에 심취하여 도사 구겸지와 불교를 의식적으로 비방한 승상 최호의 진언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최호의 불교관은, 불교를 오랑캐의 종교라고 비난하면서 탁발족-터키계 -을 중국화 할 수 있는 유교 국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불교를 제물로 삼았다. 또 그는 불교가 가르치는 모든 계급의 평등성과 통일성, 세속으로부터의 은둔, 세금의 면세, 독신 생활 따위가 유교의 이상과 대립된다고 판단해 도사 구겸지와 결탁하여 불교를 탄압하는 틀을 마련하고 이를 실행하기에 이른다.
태무제의 폐불정책의 진행을 보면, 438년 오십 세 이하의 사람이 승단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444년에는 그 누구도 개인적으로 승려를 후원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445년에 장안에서 개오蓋吳가 반란을 일으키자 장안의 승려들이 개오와 공모하여 반란을 주도 했다는 일련의 물증을 갖고 446년에 전대미문의 법난을 일으켰다.
삼무일종 법난의 첫번째인 태무제의 법난 발생 이전에 북위 태조에 의해 도인통道人統에 임명된 승려 법과는 부모나 왕에게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불경의 단호한 입장을 변질시켜 ‘왕은 곧 여래’ 라는 대담한 이론을 내세워 불교의 세속화를 더욱 가중시켰으며, 북위의 제왕들은 이를 통해 정부와 병립적인 조직의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는 정책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한 법과의 이론이 주창되는 이면에는 불교 전래 초기부터 대두되어 왔던 도교와의 사상투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계락에 내포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태무제에 의한 법난은 불교의 세속화와 외부의 도전을 권력의 힘으로 막아보겠다는 얄팍한 계산이 빚은 결과로 그 뒤로도 이와 비슷한 원인으로 법난을 자초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