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종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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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운경
1995년 02월 156호
주로 역사극을 집필하시는 독질한 불교 신자인 선배 작가분께서 몇 해 전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산사에 들어 갔는데 써야 할 글은 써지지 않고 며칠 동안 번뇌망상만 가득했더란다. 그러던 어느날 밤 눈이 지천으로 내렸는데 잠결에 싸악... 싸악 비질하는 소리가 들려 얼핏 일어나 문틈으로 내다보니 어린 행자승이 묵묵히 요사채의 마당 앞을 쓸고 있었단다.
때때로 빗자루를 툭툭 터는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행자승의 조금은 거친 입김 소리와 정갈한 비질 소리가 마치 헝크러진 머리 속을 깨끗이 정리해 주는 듯 상쾌해서 펴 누운 채 천정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귀에 익은 노장 스님의 마른기침 소리가 들리더란다.
“아무개야 법당 앞도 다 쓸었느냐?”
“네”
“그럼 비는 나를 주고 종각에 올라가서 종치고 오너라?”
“네”
잠시 후 종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고 토닥토닥... 바쁜 걸음으로 행자승은 올라가고 계속 이어지는 노장 스님의 마른기침 소리와 비질하는소리...
이윽고 산사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더란다.
그리고 종소리가 끝날 즈음에 그 선배 작가는 기원하였다고 한다. 저 종소리와 같은 작품을 쓰게 해 달라고...
산사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감히 범죄를 꿈꾸겠는가 하는 얘기도 했다. 그렇다. 산사의 종소리는 선악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연민을 느끼게 한다. 연민... 한없이 불쌍하고 못나서 사랑스럽고... 쓸쓸하다는 뜻으로서의 연민이다. 언젠가 눈 덮인 산을 오르다가 조금 전에 찍고 갔을 새의 발자국을 보고 연민을 느낀 적이 있었다. 무엇을 찾아 먹으려고 눈밭을 이렇게 앙징스럽게 찍고 갔을까… 생각할수록 발이 시려 보이고 안스러워 보이는 마음 금할수가 없었다. 발자욱을 찍는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작년에 내가 쓴 드라마의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에 대한 이야기를 한 토막하지 않을수 없다.
제비족 이야기를 취재하려고 용산 경찰서 근처의 무허가 춤방에 들렸을 적의 이야기이다. 당시 나는 철저하게 내 자신을 속이고 “국내 어느 대기업에 다니다가 지금은 실직해서 집에서 놀고 있는데 운동도 할 겸 사교춤을 배우고 싶으니 선생님께서 귀엽게 봐주십시요” 하고 정중하게 간청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니는 참으로 한심한 내가 되어 부루스는 사박자고 지루박은 육박자라는 공식에 따라 일단 부루스 스탭부터 일번에서 이십번까지 익혀 나갔다.
스승께서는 춤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도사님인데, 악성 치질로 고생하면서도 제자에 대한 사랑만은 각별했다. 예를들어 고스톱을 쳤을 때, 비교적 깍쟁이과인 호야 엄마가 끝발이 오르면 은근히 비 껍질 같은걸 풀어주고 그래도 내가 잃으면 굉장히 마음 아파하며 “인천 갈 차비 있어” 하였다. 니는 무허가 춤방에서 며칠을 딩굴며 도적에게도 도가 있고 춤꾼에게도 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스승님이 지나가는 얘기로 한 무수한 격언들이 귓전에 쟁쟁하다.“춤을 제대로 배우려면 스탭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해야 어느 정도 틀이 잡힌다. 미남은 사진이 필요없다, 오로지 실물뿐이다. 카바레에서는 국회의원 안 알아준다, 춤 잘추는 놈이 대장이다. 여자가 카바레 나와서 넘어지는 게 어디 카버레 잘못이냐, 선수가 운동장에서 넘어졌다고 해서 운동장 잘못이냐 치질 때문에 언제나 아랫목에 앉아 엉덩이를 지지고 었던 스승님... 제자의 스탬이 헝클어질 때면 벼락같이 일어나서 엉거주춤 대갈일성 하던 스승님…
이혼도 두 번이나 하고 딸 하나가 있는데, 지금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던 스승님... 내가 서울의 달을 써서 스승님을 갖고 놀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스승님... 나는 기실 그 스승이 스탭을 밟을 때마다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새의 발자국 같은 연민이다. 아, 그런 스승님의 영혼 들려 드릴 사분의 사박자 종소리는 없을까. 언젠가 새벽, 첫 전철을 탔을때의 정경이 떠오른다.
객차 안은 온통 침묵 속에 있었다. 듬성듬성 빈 좌석과 반은 졸고, 반은 눈을 감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들. 앞에 앉아 졸고 있는 사람의 차림새를 보았다. 군청색 제복에 고속버스 명찰로 보아 고속버스 기사임에 틀림없으리라. 전철을 타고 가서 버스를 끌고 어디론가 힘겹게 달려 갈 오늘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천천히 한사람, 한사람을 뇌리 속에 각인하듯 객차 안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피곤해 보였고 도무지 남자들은 머리를 감고 나온 사람이 없는 듯하였다.
“ 아 다들 이렇게 안타깝게 살고 있구나.” 다들 이렇게 새벽같이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데... 문득 뭉크의 ‘절규’ 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두 귀를 막고 누군가를 향해 소리치는 앙상한 해골의 모습. 나는 다시 한번 이런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그리는 글을 써 보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산사의 종소리를 어떻게 사분의 사박자로 각색해서 들려 줄 것인가 늘 써 놓고보면 참혹한 자신을 만난다.
그래서 글이 쓰여지지 않을 때, 아내와 사소하게 다투었을 때, 이승이 괴롭다고 느껴질 때, 나는 법당을 찾지 않고 어머니를 찾는다. 왜냐하면 어머니 속에는 언제나 법당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슬픈일이나 기쁜일, 나쁜소식이나 반가운소식에도 어머니의 의식 속에서는 관세음보살이 그저 입버릇처럼 튀어 나온다.
나이 사십이 넘은 처지에도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면 “밥먹었느냐’는 걱정부터 듣는다.
나는 막연히 인류에 대한 부처님의 사람이 어머니께서 자식 개개인에 대한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존파도 사랑하고, 세금 도둑도 사랑하고, 은행 강도 사랑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내 작품에 대하여 재미 있든 재미 없든 개의치 않아한다. 오직 얼마나 내가 괴롭고 힘들까만 염려하신다. 이렇게 따져 보면 산사의 종소리는 어머니인 부처님께서 이승의 무지몽매한 인간들의 잠을 깨우려고 두드리는 각성의 종소리가 아닐 수 없다. 눈물의 종소리가 아닐 수 없다.
몇 해 전 뿌리깊은나무사의 주최로 조자룡 박사의 민속 박물관에 기는 길에 속리산 법주사에 들른적이 있었다. 아직 어둠은 가득한데 법당뜰에서는 학인 스님들이 도열해 나와서 북과 종과 목어를 두드리는 것을 보았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저는 이렇게 자비의 종소리를 듣고 있사옵니다. 소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께서 실존하고 계심을 깨닫고 있사옵니다. 법음을 대신 전하게 해 주소셔. 미혹한 사람들을 위해서 온몸 부서지게 하는 종되게 해 주소서.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