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사 수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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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연진
1994년 11월 153호
내용미입력담양 직행버스 터미널에서 용화사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쯤 되는 것 같다. 나지막히 엎드려 있는 농가의 시골길을 지나자, 몇 채의 농가 뒤쪽으로 보이는 용화사. 먼저,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다. 그리고 올려다 보는 금빛 부처님. 대부분의 물질은 반사를 통해 저마다의 자태를 드러내는데, 금은 자체가 빛을 지녀 자기를 주장하며 과시한다고 한다. 그러한 금의 특성이 부처님과 알맞은 성향이라서 금을 잡숫게 하여 금부처님을 조성한다. 절에 오면 으레 법당부터 들르는 것은 그 곳에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늘 그 분을 만나고 돌아가지만 우리가 예불을 드리는 신앙의 대상인 불상을 어덯게. 누가 만들어 모셨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우주의 생명체를 불어 넣어 부처님의 형상과 가장 가깝게 조성하려고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 분들이 있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여느 때보다 법당의 부처님에 눈길이 오래 머문 것은, 전통법을 계승해 복장腹藏불사佛事는 물론 불교의 모든 의식, 수륙제, 영산재, 예수재, 점안 불사를 여법히 치루어내는 수진스님이 용화사에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의 일이다. 부처님이 당신의 어머님을 위해 법문을 하려고 백 일 동안을 도리천에 가 계셨다. 우전국 왕은 부처님을 뵙고 싶은 마음에 일류 공예사를 불러 전단향 나무로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을 만들게 했다.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돌아와 우전국을 방문하셨을 때, 크기나 모양이 부처님과 똑같은 나무로 조성한 불상이 걸어나가 부처님을 맞아들였다고 한다. 부처님의 상징인 불상이 처음 나오게 된 동기이다.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 나온 사리는 여덟 섬 너 말. 그 천문학적 숫자의 사리가 여러 나라에 퍼져 불상에 모셔졌다. 사리를 불상 속에 넣음으로써 불상이 전신 부처님으로 화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에는 불상의 머리 부분에 사리를 장치하면서 차츰 배 안에 넣었을 것이라고 한다. 복장腹藏은 불상을 조성하면서 배 안에 봉안하는 사리와 여러 가지 유물을 말한다. 살아 계시는 부처님과 가장 가까운 형상을 만들어 모시려고 우주 생명체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을 배 안에 넣는 것을 복장 불사라고 수진스님은 설명한다. 스님은 “복장”이라는 말조차 낯설어 하는 기자에게 마치 실타래 풀 듯 복장 불사를 풀어 내놓는다. 오행에 맞춰 병을 다섯 개 만들어 예순여 가지의 물품을 넣는데, 그 물품은 이렇다. 오곡, 오(다섯 가지)보석,오황,오겨자,오보리수,오금강저,칠보,그리고 경전, 복장기, 조성기 따위를 넣는다. 한 가지 한 가지의 물품을 넣을 때마다 백팔 염불을 한다. 전통법에 따라 물샐틈 없는 정성과 신심으로 부처님을 세 분 정도 모시는 데는 세 시간에서 네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복장 불사가 끝나면 점안식이 행해진다. 불상 점안은 부처님이 가진32상80종호의 장엄을 나타나게 해달라는 것으로 불상의 눈동자를 붓으로 그림으로써 끝난다. “복장 불사를 여법히 해서 부처님을 잘 모시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부처님을 대하는 자세부터 큰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부처님을 잘 모셔서 점안식을 해야 서기 방광되어서 신통력도 나오는 거지요. 우리 사바세계라는 것이 부수어지고 변하니 오랜 시간이 지나 이 불상이 발견되면, 언제 누가 조성했는지는 물론 그 시대의 불교 신앙의 경향, 사경寫經미술美術,나아가서는 당시의 문화까지도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겠지요” 해인사 약수암 약사여래부처님의 복장 불사도 스님이 했는데, 절 한번 하고 신경통이 나은 사람이 많다는 소문이 있다. 얼마 전 운주사 천불 천 탑의 지장보살도 스님의 손을 거쳤고, 금산사 열한 부처님. 서울 영화사 삼존불상. 해인사 보현암 탱화 복장도 스님의 복장 불사를 거쳤다. 이루 기억해 낼 수 없을 만큼 스님의 손을 거쳐 간 불상이 많은데, 운문사 일곱 부처님의 복장 불상의 점안식이 십일월에 있을 예정이란다. 스님이 하는 불교 의식은 사실 복장 불사나 점안 불사만이 아니다. 전라남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수륙재나 영산재, 예수재는 거의 스님이 주관을 해 치루어 내는 의식이다. 출가 수행의 길에는 눈 밝은 스승과 어진 도반이 절대적이란 말이 있다. 배우고 익힌 대로 그 길을 걸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이 불교 의식을 수행의 길로 삼은 까닭 또한 “묵 담 스님”이라는 스승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아마도 스님은 당신이 묵 담 스님을 시봉하는 연이 없었으면 강원의 강사가 되었거나 선방의 선객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만큼 묵 담 스님과의 만남은 스님에게서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62년도 비구승과 대처승을 합하는 통합 종단이 탄생되기 전, 비상종단이 구성되어 각각 종정을 추대할 때, 대처승 쪽에서 추대한 분이 묵 담 스님이었다. 묵 담 스님은 청정 비구승이었지만, 정화 자체는 찬성하나 방법 문제에서 의견을 달리해 대처승 쪽에 서 있을 때였다. 그 뒤 비구, 대처가 분리되어 종단이 ‘한국불교조계종’으로 있을 때 만 암 스님의 뒤를 이어 ‘한국불교조계종’의 종정을 지낸 분으로 만 암 스님을 사십오 세까지 모시며 그 분과 생각을 함께 했다고 한다. 평생을 청정비구승으로 일관하며 바늘귀만큼도 계율을 흩트리지 않은 율사였지만, 72년도 한국불교 조계종이 태고종으로 바뀌면서 태고종에 승적을 두게 되었다. “우리 노스님은 불교 전통의 법을 그대로 전수한 한국 불교의 일류 율사였지요. 율은 물론 선과 교를 빈틈없이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아홉 살에 동진 출가하셔서 여든여섯에 열반하셨는데 칠십칠 년 동안 계율을 청청히 지키시면서 중생을 제도하는데 뜻을 두고 모든 방편을 다 쓰셨습니다. 부처님 법에 우리 노스님처럼 철두철미하게 아는 분은 드물 것입니다. 편법을 모르는 원리원칙 주의자 셨기 때문에 모든 불교 의식을 가르치시면서도 물샐틈없이 하셨지요.” 부처님 이후 내려온 계맥(系脈)이, 달마대사가28대, 혜가 스님이29대, 그 뒤 태고 보우스님을 거쳐 77대 묵담 스님으로 이어지며 한국 불교의 정맥이 내려왔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스님은 묵담 노스님의 손제 상좌로 엄하고 빈틈없던 노스님을 스 무해 가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눈으로, 손으로, 마음으로 복장 불사는 물론 영산재, 예수재, 수륙재, 가사 불사, 점안 불사를 익혔다. 노스님은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착실하게 자신을 따라 주는 손제 상좌를 모든 불사에 데리고 다니며 이래라 저래라 자질구레한 말씀 없이 현장 실습을 시켰다. 법식에 쓰일 물품을 만들고, 의식문을 쓰고, 재료를 채취해오고, 불사에 데리고 가서 염불을 시키며 손제 상좌에게 당신이 익힌 법을 전수하였다. “내가 죽으면 이런 법문을 들을 데가 없으니 착실히 적어 놓으라”하시며 의식문들을 하나하나 정자로 받아 적게 했는데, 어쩌다 글자 하나를 잘못 쓰면 처음부터 다시 쓰게 할 만큼 꼼꼼하고 깐깐했다. 차 한 잔을 드셔도 부처님께, 성인께, 일체중생께 공양을 올리고 당신의 입으로 가져갔으며, 평생 채식으로만 일관했다. 스승이었다고 스님은 회고했다. “출가자는 절집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있는 법 없애지 말고 없는 법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네가 잘 계승해 지켜 나가기만 하면 언젠가는 금 조각이 될 때가 있으니 잊어버리지 말고 잘 지켜 나가라는 당부를 하시곤 했습니다.” 스님이 묵담 노스님을 만나 것은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노스님과 연이 있었던 속가의 숙부님이 “어디 중 될 쓸만한 아이 하나 없느냐”는 노스님의 말씀을 듣고 당신의 조카를 데리고 갔던 것이다. 노스님은 스님을 보더니 “중노릇 하면 좋겠구나”하며, 한 달에 쌀을 두 말씩 줄 터이니 졸업하고 중노릇 해라 하셨다. 밀기울로 밥을 지어 먹던 어려운 시절, 스님은 절에 가면 쌀밥이며 김이 무럭무럭 나는 떡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았고, 도골 선풍의 모습을 한 노스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그러겠다고 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이나 방학이 돠면 스님에게 가 시봉을 해드렸다. 졸업을 하고 머리를 깎으려고 노스님께 갔더니 좋아하시며 다른 스님들을 불러 계를 받게 해 공부하게 하라고 일렀다. 한두 달 행자로 있다가 노스님의 제자인 지광 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깎고 백양사 강원으로 갔다. 비구,대처승이 함께 살던 시절이었는데 강사 스님이 대처승이었다. 스님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문을 어지간히 익힌 터라 강의를 듣는 데 별로 어려운 것이 없었다. “대처승은 강사를 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강사 스님이 보따리를 싸 가지고 가는 바람에 강원이 문이 닫혀 해인사 강원으로 가게 되었다. 손톱에 낀 때와 젖은 손이 마를 날이 없던 호된 시집살이 행자 시절, 틈나는 대로 계곡에 들어앉아 서장을 죽어라 외웠다. 강원에서 공부할 때도, 남들은 쉬는 시간에 공을 차러 나갔지만 책상에 앉아 책만 읽었는데, 능엄경에 들어갈 때 중강을 맡게 되었다. 경 공부하랴, 치문을 가르치랴 하루 두세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해 몸무게가 사십삼 킬로그램까지 빠졌다. 관조스님이 당신의 뒤를 이어 강의해 줄 것을 부탁했으나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방으로 올라가 성철스님께 삼천 배를 드리고 화두를 받아 해인사에서 네철 안거를 지냈다. 그 뒤 경봉스님 회상으로 가 한 철을 지냈는데, 하루는 경봉스님이 법문을 하시면서 수좌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동네에 안 내려가지?” “네, 안 내려갑니다.” “그래, 내려가지 마라. 내려가 공연히 다른 것 먹으면 공부 안 된다. 우리 수행자들은 채식을 하며 공부하기 때문에 피가 맑고 정신이 맑아 참선이 잘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속가에 내려가 번뇌의 죄업으로 만든 동물의 고기를 먹으면 번뇌 망상이 늘어나는 것이다.” 어른 스님들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원리원칙주의자였던 스님은 한번도 마을에 내려가 기웃거린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고의적으로 계율을 어겨보지 않았다. 그 뒤 수좌 몇이 모여 서울 백운암에서 서옹 스님을 모시고 한철을 지낸 뒤 인사차 용화사에 왔더니 묵담 노스님이 그러셨다. “맨 날 그렇게 돌아만 다닐 거니. 내 나이도 이미 많은데 시봉할 사람도 마땅치 않고 내 법을 계승할 사람도 없다.” 강원과 선방이 다인 줄 알던 시절이었으나 제대로 시봉할 사람도 없는 노스님을 모시기로 했다. 출가한 지 육칠 년 뒤고, 조계종 승적을 태고종 승적으로 바꾼 것도 용화사에 주석하면서 노스님을 시봉하면서부터이다. 지금 해인사 율원장으로 계신 종진스님이 해인사 강사로 와 줄 것을 권한 적도 있으나 노스님을 모시는 데 일념해 오늘에 이르렀다. 철두철미하게 계율을 지켰던 스승과 무엇이든 대강 넘어가지 못하는 꼼꼼한 성격의 만만치 않은 손제자가 만났기 때문일까.누구라도 시봉을 잘못하면 주장자나 매, 귀싸대기를 가리지 않고 날리던 노스님이었으나 철저히 시봉해 드리는 손제 상좌인 스님에겐 스무 해 동안 그런 일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단다. 스승과 제자는 어느 것에서든 닮는 것일까.묵담노스님이 환갑이 넘도록 자신의 법을 계승시킬 제자를 두지 못했듯 스님에게도 아직 제자가 될 요건으로 불경에 정통해야 할 것과 계행을 청정히 지켜야 할 것. 중노릇을 잘 해야겠다는 확신이 있을 것을 꼽는데.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나타나지 않겠냐며 웃는다. 용화사는 묵담스님이 육이오 때 민가집을 절로 만들어 조금씩 땅을 사들이며 일구어 놓은 절이다. 그리 화려하게 치장해 놓은 절은 아니지만 용화사에는 보물이 많다. 석가여래 탄강부터 고려 충숙왕 때인 1334년까지의 고승대덕들에 대한 전기를 편년체로 수록한 ⌜불조역대통재⌟가 보물 제737호로 지정되어 완질로 남아 있다. 조선 중기 때의 스님인 연담스님이 쓴 화엄경 사기의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데,지금 스님들의 화엄경 교재로 쓰이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원본도 용화사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자그마한 절이 온통 보물 창고인 듯하다. 책을 가까이하고 좋아했던 노스님의 법력에 연유한 것인데,노스님 탄생 백주기인 내년에 문집을 내려고 작업중이라고 한다. 저녘 어스름,우린 수진스님이 절 뒷산인 추월산에서 직접 털어 따왔다는 산밤을 한아름 받아들고 용화사를 뒤로 했다. 용화사에 미륵부처님을 모실 예정이고,복지 쪽에 눈을 돌려 양로원을 지으려는 스님이 추월산에서 불어오는 가을 바람속에 서 있었다. 박원자 지남 10월호 호계삼소 내용 중 11쪽의 “갈치장사를 해 연명하거나”라는 내용은 사실과 다름을 알려드립니다. 관계되시는 분들께 본의 아니게 누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