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사는 가야산 단지봉과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사이에 솟아 있는 불령산 자락에 숨은 듯 자리잡고 있다. 경북 금릉군 증산면 평촌리.’산 속의 울릉도’라고 불릴 만큼 오지에 있다. 신라 헌안왕 2년(858)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그 뒤 조선시대 때 화재로 인해 몇 번의 중창이 있었다가, 1911년 화재로 전소된 것을 대운 대사가 현재 건물 일부를 중건했다. 근세 한국 불교의 최고 강백으로 일컫는 박한영 스님이 주석해 있을 때는 학승들이 무려 이백여 명에 이를 만큼 일제 시대 때에 전통 강원으로 이름이 있던 절이다. 고봉 강백스님이 주석하였던 1975년까지만 해도 많은 학승을 배출하며 전통 강원으로의 맥을 이어왔으나 그 뒤로 쇠락한 암자로 있었다. 팔 년 전, 지형스님이 학인 스님 스무 명을 데리고 이 곳에 왔을 때는 쇠잔한 가람에 대여섯 분의 스님네가 갈치 장사를 해 연명하거나 고시생들을 받아 하숙을 치고 살 만큼 어려운 절이었다. 처음에는 그릇 하나 변변한 게 남아 있지 않아 이 빠진 그릇에 밥을 담아 공양을 하며 스승도 제자도 울었다는 게 청암사에서 행자를 시작한 어느 스님의 귀띔이다. 스님은 구석구석 허물어져 가는 가람에 불사를 시작해 천 년 가람의 역사를 되살려 내고, 강원을 열어 미래 한국 불교의 위상이 될 젊은 수행자를 배출해 냈다. 지난 팔 년 동안 쉼 없이 진영각과 육화료를 보수하고 부속 건물인 중현당, 선열당과 극락전을 중수했는데, 어느 것 하나에도 스님의 손길과 눈길이 머물지 않은 것이 없다. 지붕에 기와를 얹을 때 수십 통의 흙을 져올리고, 기와를 지붕으로 올려 기왓장을 덮은 사람은 청암사 학인 스님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방이란 방의 도배는 모두 청암사 스님들이 했고, 절에 딸린 밭농사, 논농사를 짓고 나무를 해 쌓아 놓은 것도 청암사 스님들이란다. 그야말로 목수 하나만 있으면 만사가 진행될 수 있는데 하루는 스님들과 일을 하던 어느 목수가 애원하다시피 하더란다. 불사에 동참했던 한 스님의 말이다.”우리 절은 사중 따로, 학인 따로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모두 이것이 우리 살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학인들이 공부를 하면서도 불사에 기쁘게 동참할 수 있는 거지요”지난 번 개혁에의 동참 여부를 놓고도 그랬듯, 청암사의 절 운영 방침은’자율적’인 데에 있다. 결정을 내릴 일이 있으면 대중 공사를 벌여 대중들의 의사에 따르고, 원칙만 정해지면 나머지는 자율에 맡기는 것이다. 대중공사에 따른 최근의 일화 하나. 지난 여름, 최형우 장관이 화해의 제스처를 쓰며 조계사와 해인사를 방문하고 다닐 때의 일이다. 청암사에 그가 온다는 소문이 들어왔다. 곧바로 그 일을 대중공사에 부쳤음은 물론이다. 결론은”그를 청암사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는 것 그가 온다는 날에 비가 몹시 내렸다. 대중스님 모두가 비를 철철 맞으며 일주문 밖에 서 있었다. 온다는 소문만 남기고 그가 오지 않았지만 청암사 스님들의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음은 보지 않았아도 짐작이 되는 것이다.
스님은 동학사 강원 학인 시절에 이미 중강의 소임을 맡았으니 후학강의를 오래 한 셈이다. 절집과의 인연이 깊어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법인스님을 은사로 운문사에서 머리를 깍았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쯤 전이다. 강원을 마치고 동학사를 떠나 은사 스님 밑에서 살다가 선방에 가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절 형편이 어려우니 두 철만 나고 들어오라고 하시더란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선방이 따로 있어 몇 년씩 결사를 하는 곳이 없었다. 결제철마다 선방으로 가서 참선을 하고는 해제가 되면 다시 돌아와야 했던 시절이었다. 두 철 만 나고 들어오라는 은사스님의 말씀에 삼 년쯤 참선 공부에 몰두하리란 계획을 접어 두었다. 평생을 참구해도 모를 참선 공부를 두 철 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아 공부를 더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에 다니면서 그 무렵 서울에 있던 지관스님에게 강원에서 공부한 것을 다시 수강했다. 지관스님 밑에서 공부하던 사람들과 합류해 낮엔 학교 강의를 오후에는 다시 경전 강의를 들었다. 초기 경전에서부터 화엄경까지 읽었으니, 사 년 동안 옹골차게 공부를 하며 오늘날의 후학들을 위한 강의 준비를 한 셈이다. 학교와 경전 재강을 마치고 화운사 강원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화운사의 강사를 천거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지관스님이 지형스님을 추천했다. 그렇게 후학들을 위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이미 십수 년 전의 일이다.”마음을 관조하지 않고는 아무리 경을 들여다보아도 이익이 없어요. 경전을 읽고 공부한다는 것은 사회의 학문이나 지식하고는 전혀 틀립니다. 관조하는 마음이 없으면 경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우니까요.”결국 선보다는 경을 택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이다. 선과 경을 따로 떼어 이해하려 했던 기자가 곱씹어 봐야 할 말씀이다. 경을 보면서도 하루에 한 시간쯤 참선을 한다는 스님은 요즘의 강원 학인들의 생각이나 태도가 예전과는 많이 바뀌었음을 느끼고 있다. 스님의 강원 시절만 해도 지금처럼 경전 공부 외에 특강이나 다른 공부를 할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한 경전을 읽더라도 깊게 공부해 육 년 남짓의 강원 생활에서도 경전 공부를 다 끝내지 못했는데, 요즘은 많은 과목을 빨리 훑고 가는 경향이라며 아쉬움을 표한다.”지식이 한낱 지식으로만 남고 지혜로 승화될 수 없다면 그 지식은 인간 형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스스로 탐구하고 체험해 자기 고집으로부터 벗어나 이웃에 눈을 돌려 골고루 나누어 가질 때 부처님의 제자로서 제 몫을 다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청암사에서는 양적으로보다 질적으로 교육하고 싶습니다. 그 동안은 불사 때문에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습니다. 올해부터는 장학금도 마련하고 밖에서 훌륭한 교수들을 모셔다 강의도 받게 할 생각입니다.”스님 자신이 학인들은 가르치는 강주 입장이고 보면 공부 잘하고 깔끔한 제자를 아낄 것 같다.”그렇지 않습니다. 청암사가 공부하는 도량이니까 공부를 잘 시켜야겠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긴 하지만, 누구나 다 공부 잘하는 소질만 있을 수는 없어요. 살림을 잘하는 사람, 법회를 잘 이끄는 사람,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 등 갖가지 자기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초기에는 공부 열심히 하게 하려고 야단도 치고 하지만 얼마쯤 시간이 지나 그들의 성격이 드러나면 소질대로 공부할 수 있도록 밀어줍니다.”요즘 스님은 경전 외에 불교 사상이나 불교 역사에 관한 책에서부터 사회과학 등의 책을 읽고 있다고 한다. 청암사 식구면 누구나 종종 새벽 두세 시까지 스님의 방에 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본다. 절집의 아침이 새벽 세 시에 열리는 것이고 보면, 오래 불이 켜져 있는 스님의 방을 쳐다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고 한 학인 스님은 전한다. 적막하리만치 조용한 청암사에 토요일 오후가 되면 갑자기 떠들썩해진다. 어린이 법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런 오지에 아이들이 어떻게 올까? 금릉군의 면 소재지 중에서 교회가 하나도 없는 곳이 증산면인데, 스님이 청암사에 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교회가 들어선다는 얘길 듣고는 어린이 법회를 시작했다. 사실 청암사 살림을 꾸리기에도 벅찼던 때라서 몇 년쯤 뒤에나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교회가 들어선다는 바람에 앞당겨 어린이 법회를 시작한 것이다. 사실 어린이 법회는 손이 많이 가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 일이어서 선뜻 시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청암사는 드나듦이 불편한 곳이어서 토요일이면 봉고차를 가지고 나가 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가 데리고 온단다 데리고 와서는 점심을 먹이고 다음 차로 도착할 아이들을 기다리며 배구니 배드민턴 따위의 운동을 시킨 뒤 법회를 연다. 많이 모일 때는 구십여 명까지 오는데, 올 여름방학 수련회에는 다른 지방에서까지 와서 이백오십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대웅전 앞 정법루에’적정다원’이란 팻말이 붙어 있어 이 깊은 절에 웬 다원인가 싶었는데 어린이 법회 기금 마련하려고 일요일과 공휴일에만 스님들이 운영하는 것이란다. 공부하는 짬짬이 다원을 운영해 기금을 마련할망정, 선거를 앞둔 군의원 출마자가 법당에 슬며시 놓고 간 돈을 기어이 불러 돌려주고 말았다는, 자존심이 펄펄한 스님들,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란 생각이 든다. 비구니 스님으로서 몇 안 되는 개혁회의 의원이며,’비구니 위상 정립’을 들고 나온 정혜도량의 상임위원이기도 한 스님에게 현 시점에서 비구니의 위상은 어떻게 정립되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계율을 똑바로 지키고 비구니의 본분사로 돌아가 수행하는 거지요. 비구니는 비구니답고, 비구는 비구다울 때 저절로 위상이 정립되리라 믿습니다.”그러면서 스님은 좀 더 뒷날 개혁에 대한 얘기며 오늘날의 불교 현실에 얘기하고 싶다고 하며 말문을 닫았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의 인연을 기다릴 수밖에. 사실 스님을 만나기 전엔, 걸걸하고 굵직한 목소리에 위풍당당한 활동가의 모습을 상상했고, 몇 번에 걸친 인터뷰 요청도 사양했던 터라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비구니 스님을 연상했다. 매끈한 음성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섬세한 마음 씀씀이, 어려운 불사를 일구어 낸 활동적인 스님이라기보다는 공부에 전념하는 학승, 그러면서도 어려운 시기에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릴 줄 아는 가슴 넓은 비구니 스님이라는 게 스님을 보면서 기자가 느낀 단상이다.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별 하나를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청암사의 일주문을 나서며 수행자란 바로 그런 사람들일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