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와 목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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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박이엽
1994년 10월 152호
불교는 철학이고 기독교는 윤리라고 말한 사람이 러셀이었지만 쉬바이처였는지 잘은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말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크리스찬들에게 불교나 힌두교의 스님들과 논쟁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스님들은 허구한 날 먹고 앉아서, 아니 어쩌면 먹고 자는 것조차 걸러가면서 생각만 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덤벼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이길 수 있는 길은 윤리적인 실천에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아마 쉬바이처일 것이다.
젊었을 때 가까운 사찰로 스님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 무렵 교회에 다니던 나는 비록 크리스찬이지만 한국인의 의식에는 전통적인 불교의 요소들이 자리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불교 공부를 좀 해 보자는 뜻에서 교회 청년들과 함께 가을 소풍 겸해서 갔었다. 주지 스님은 우리가 찾아온 얘기를 듣더니 무척 반기면서 법당에 앉히고는 여러 말씀을 해 주셨다. 한참을 듣다가 둘러보니 우리 일행말고도 소풍객과 등산객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듣고 있었다. 스님의 말씀은 그만큼 쉽고 재미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이야기가 있다. 천야만야한 절벽 위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한 아이가 가지를 잡고 달랑 매달렸다. 그리고 나서 밑을 보니 천길 낭떠러지였다. 겁이 나서 사람 살리라고 외쳤으나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버둥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그 아래로 아버지가 지나가다가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절 살려 주세요.”
혹시나 아버지 귀에 들리지 않을까 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외쳤지만 아버지는 대수롭잖게 말씀하신다.
“이 놈아 놓아라.”아들이 못 알아듣고 되물었다.
“네?”아버지가 대답하셨다. “그 손을 놓으란 말이다.”“아버지 미쳤어요. 이 손을 놓으라니, 절더러 떨어져 죽으란 말이에요.”“인석아, 아무 일 없으니 그만 탁 놓아뿌리라.”
“아이구 아버지, 힘 빠져 죽겠습니다. 놀리지 마시고 제발 좀 살려 주소!”“허 그 녀석, 어서 놓으라니까.”부자간에 선문답 같은 소리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나뭇가지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빠져서 마침내는 아래로 툭 떨어졌다. “아악...”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떨어진 아들은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놓으면 죽는 줄 알고 아등바등 매달렸던 가지를 놓아 버리는 그 순간 발 밑이 바로 땅이었다. 한 길도 안 되는 높이에 매달려서 그것이 천야만야한 절벽인 줄 착각하고 잡은 가지를 놓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집착을 버리고 망상에서 깨어나라고 가르치는 게 불교라는 것이었다. 불교인들에게는 아주 초보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우리들은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 이 이야기를 기독교식으로 번안하면 어떻게 될까. 딱 들어맞지는 않을 것 같으나 쟝 칼로 메노티 작곡의 오페라’아말과 동방 박사들’이 있다. 이스라엘의 한 변방에 아말이라는 절름발이 소년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집이 워낙 가난하여 소년 아말은 목발을 짚고 다니는 절름발이면서도 남의 집 양떼를 돌보아 주는 목동 일을 하였다. 어느 추운 날 밤, 멋진 백말을 탄 백발 노인 세 분이 지나가다 하필이면 외진 곳의 가장 초라한 이 집에 와서 하룻밤 묵어 가자는 것이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극구 사양했지만 아말은 자기 집에 이런 훌륭한 손님들이 오신 게 너무나 황홀하여 그만 어서 들어오라고 하였다. 소년의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서 저녁을 대접한 뒤에 손님들에게 방을 내 주고 자기들은 헛간에서 잤다. 이튿날 새벽이 되어 세 분 노인이 떠날 채비를 하는데,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마을 사람들이 제각기 선물을 한 가지씩 들고 몰려왔다. 그들의 이야기로 세 노인은 동방박사라는 것과 지금 예루살렘에 구세주가 나타나서 영접하러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금부치를 갖고 와서 새로 태어난 아기 구세주에게 전해 달라며 맡기고 비단, 염소, 닭, 하다 못 해 달걀 한 꾸러미라도 갖고 왔다. 그러나 아말의 집에서는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었다. 어머니는 세 분 박사들께 잠자리를 내들인 것으로 위안을 삼고자 했지만, 소년 아말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박사님들은 마을 사람들이 가져 온 귀한 선물들을 모두 챙겨서 말잔등에 싣고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하였다. 그 순간, 소년 아말은 박사님 한 분을 붙잡고 말했다.”잠깐만요, 박사님.”그러고는 자신이 짚고 서 있던 목발 한짝을 번쩍 들어서 박사님에게 내밀었다.”제게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어머니가 나직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제가 미쳤나. 아기 구세주가 절름발이일까. 저는 어떡하려고.”그러나 박사님은 아무 말 없이 소년이 주는 목발 한짝을 받아 날안장 위에 실었다. 그리고 떠났다. 모든 사람들이 동구 밖까지 따라가며 배웅하는데, 아말 소년도 함께 했다. 소년은 이미 절름발이가 아니었다. 목발을 주어 버린 소년은 어느새 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위의 두 이야기를 가지고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말함은 무리일지 모른다. 또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의도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무튼 쉬바이처가 말한 철학적인 불교와 윤리적인 기독교라는 비유에는 꽤나 부합되는 성싶다. 위의 두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일깨움이 있는데, 나는 그 어느 쪽도 버리지 않고 다 수용하고 싶다.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잘못된 집착이 얼마나 어이없이 끝나는지를 우리는 경험하였다.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이 분단 체제는 절름발이가 짚고 선 목발이 분명하다. 과감히 내던지고 당당히 설 날이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