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와 성인이 어디 있겠느가.
(청중 가운데에 누군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소리질러 답한다.)
거기 있다고 한들 거기가 뭐요. 여기 있다는 것은 삼척 동자도 압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요.
부처와 조사도 서지 못하니
서천 28대인의 조사도 훔친 물건을 안고서 ‘낭패다’소리 치며 굴복하고 1709만8인은 두 눈에 모래를 뿌림이로다.
글자나 말을 따라가지고 수지가 맞겠습니까. 비법은 부처님에게도, 육조스님에게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마음 속에 비법이 있는 것입니다.
비밀한 부적을 불 살라 없애 버리고
옛 거울을 부숴 없애 버리며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살리는 일들이 자유자재하니
필경에 이 무슨 도린고?
산호가지 끝에 꽃이 피고 치자 숲 속에 큰 과실이 익었도다
치자 숲 속에 큰 과실이 익을 수 있을까요?
있지.
이 참선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이 교라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교가에서는 중도 이론의 체계를 말씀했던 것이고, 선종에서는 중도의 실천 부분을 말씀했던 것입니다. 오직 불법이라는 것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요, 실천하기 위한 이론인 것입니다. 담 넘어 소뿔이 보이면 소 한 마리 있는 줄 알아야지 바쁜 세상에 담을 넘어가 소를 보고서야 소가 있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척 알아차려야지.
중국 송나라 때의 일입니다. 명심보감에도 나오는 유명한 정의천 선생이 원행을 떠날 일이 있어 배를 타고 집을 떠나는데, 마침 그 때 누더기를 입은 보잘 것 없는 스님 한 분이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난데 없이 풍랑을 만나 생사를 헤맬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무리 수행이 깊은 정의천 선생일지라도 마음을 어이할 수 없어 태산 같은 걱정을 했고, 다른 사람들도 아우성을 치며 엎어지고 난리였습니다. 그런 중에서는 그 스님은 태연자약하게 걸망을 턱 벗어 목침을 삼고 드러누워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잠을 자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정의천 선생이 아무리 참선을 하는 스님이라도 목숨을 잃을 판에 어떻게 저렇듯 태연자약하게 잠을 잘 수 있는가 감탄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풍파가 멎고 목적지에 이르러, 정의천 선생이”참선하는 스님으로 인정은 하지만, 얼마나 공부가 장하면 죽는 자리에서도 그렇게 태연히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랍니다. “아, 그거야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물을 일이 뭐 있소. 나는 일찍이 바다에 나와 바다를 본 일이 없고, 바다를 보지 않은 사람이 배를 탄 일이 있겠소. 바다를 보고 배를 탄 일이 없는데 죽고 사는 일이 어디에 있겠소?”이게 그 스님의 대답입니다. 얼마나 멋진 생활입니까. 생사에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입니다. 우리 자성에는 생사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도가 뭡니까? 마음입니다. 잠을 자는 사람에게 꿈이 있고, 잠을 자지 않은 사람에겐 꿈이 없는 것처럼,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슬픈 생각, 무서운 생각, 미워하는 생각,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마음이 우주인데, 전체가 청정법신인데, 분별심이 모두 끊어졌는데, 너도 나도 없어지고 물질도 없어졌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소. 여러분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 시간만 사람인 줄 알지 마시오. 인연법에 의해서 구십여섯 종 외설법을 모두 항복받았습니다. 이 시간만 사람이고 이 시간만 요런 물건을 끌고 다닐 뿐이지, 나는 어머니도 아니고 처녀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요, 속지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