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대한 논쟁 어디까지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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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2년 07월 125호
깨달음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깨달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닦을 것인가? 그리고 깨달음과 사회적 실천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은 올 4월 13일부터 이박 삼일 동안 지리산 실상사에서 열린 선우도량 수련 결사와 5월 15일 도서출판 민족사가 주최한 학술 세미나의 주제이다.
선우도량은 90년 11월에 창립된 출가승 모임으로 승풍 진작과 올바른 승가상 정립을 위한 결사운동을 주창하며 활동하고 있다. 수련결사는 봄과 가을 해제철에 비구승들이 이박 삼일 동안 하나의 주제에 대하여 연구 발표와 토론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일종의 수련대회로서 지금까지 세 번 열렸다.
민족사는 불교 전문 출판사로서 특히 불교학 관계 분야에서는 독보적이다. 민족사는 주요 쟁점들에 대한 관련 학자의 연구 발표는 물론 독자와 함께 토론하며 다각적인 조명을 시도해 보려고 세미나를 준비했다고 한다.
앞의 두 행사에는 요즘 드물게 많은 대중이 참여하여 열띤 논쟁을 전개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선우도량의 수련결사는 휴암스님의 ‘깨달음의 문제’에 대한 기조 강연과 지운, 효림, 법성스님의 ‘깨달음의 교리적 해명’ ‘깨달음과 사회적 실천’ ‘깨달음과 제종의 종지’에 대한 발제가 있었다. 그리고 네 명의 대표 토론자가 선정되어 각각의 논문에 대한 논평도 하고 질의와 토의도 벌였다.
민족사는 ‘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돈점 논쟁의 역사와 현재)’라는 제목을 내걸고 여섯 명의 학자가 발표자로 나섰다. 김호성 씨의 ‘돈점 논쟁의 반성과 과제’ 강혜원스님의 ‘북종 신수의 돈점관’ 전재성 씨의‘티베트 불교의 돈점 논쟁’ 전해주스님의 ‘종관과 종밀의 돈점관 비교’ 서종범스님의 ‘서산대사의 돈점관’ 이동준 씨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통시적 고찰’ 등이다. 토론자로는 권기종, 최인황, 전치수, 목정배, 신현숙, 정순일 교수가 참여했다.
깨달음과 현실 참여
휴암스님은 기조 강연에서 “이 시점에서 새삼 깨달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일상 활동 속에서도 깨달음이 가능한가. 깨달음과 현실 참여의 과제를 병행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의 여부를 정리해 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문제에 대해 휴암스님은 “불교의 깨달음은 윤리적 자각이나 도리의 깨달음이 아니라 존재의 깨달음이다. 그리고 불교의 깨달음의 길은 활동적이라기보다 명상적인 방법이다. 활동 속에 존재는 절대 보증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과 현실의 길은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깨달음이 없는 어떤 활동이나 운동도 한낱 물거품에 불과하다” 면서 “방편주의를 버리고 지기 근원으로 문제를 풀어가라”고 충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현응스님은 “역사적 제반 문제의 해결 열쇠를 깨달음에서 구함도 맞지 않으며, 역사적 활동 여부로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함도 논리적 오류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하나의 삶에 충돌없이 조화할 수 있다고 보는 데는 긍정적이다”며 다소 다른 견해를 말하면서 재차 질의했다.
휴암스님은 “아라한과 보살의 깨달음은 같은가, 다른가” 라고 반문하면서 아라한의 소요자적은 의도적인 것인지 자연스러움인지가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대답했다.
지운스님은 발제문에서 “깨달음의 내용은 시공을 초월하여 불변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깨달음은 방법이나 그 경지는 다를지라도 원시불교, 대소승, 선종 모두 깨달음의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중요한 것은 깨달은 법은 고苦를 해결하는 원리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토론에서도 지운스님은 “깨달았다면 윤리나 사회 병폐 등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곧 부처님 연기관이면 세계를 바로 볼 수 있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효림스님은 “과거나 오늘의 역사에서 깨달음에 집착한 나머지 실천이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왔다”고 진단하며 “오늘의 불교가 살아남으려면 깨달음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노력이 요망된다”고 주장했다. 또 “인간의 삶과 역사 위에 실천되지 못한 깨달음은 모두 관념의 깨달음이다”고 질타하며 “자본이 가져다 주는 계급성과 불평등을 거부하고 민족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인 민주화와 통일에 앞장서 실천하는 것이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깨달음에 대한 제종의 종지를 설명한 법성스님은 “종파는 계, 정, 혜 가운데서 강조하는 바에 따라 의지하는 경전 수행 방법론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방법론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다만 바른 지견을 가지고 하느냐가 문제이다. 그런데 한국 불교는 통불교라고 하면서 종의 방향성을 하나로 획일화시켜 결국 불교의 세계관에서 벗어난 바깥길로 끌고 가는 왜곡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하고 “한국 불교는 사상의 본질을 견지하는 토대 위에서 자기 철학의 시대적 해석을 감행해야 하며 시대 대중의 요구에 따르는 새로운 종지를 기성의 가치 체계 속에서 재도출해야 하는 전환의 시기다”고 설파했다.
발제 논문이 수록된 「선우도량」책자 2호가 배포된 뒤 통불협(의장/지선)은 기관지「불교운동」5호를 통해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은 일체의 운동에 대한 부정’ 주장을 아래와 같이 강력히 반발하였다.
“몸속에 꿈틀대는 이기심의 출처는 내가 처한 크고 작은 다종 다양한 객관적 현상에 연기되어 ‘5온 12처 18계’ 교설에 따라 생겨나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소멸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보살행을 통한 선업의 축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며, 그리하여 비록 육체적으로 제한된 생명이지만 그 실천의 공덕만은 결코 유한하지 않다.”
돈오돈수 돈오점수
돈점 논쟁은 81년 성철스님의 「선문정로禪門正路」가 발간된 지 채 십년 이 못된 90년 10월 13일과 14일 보조사상연구원이 송광사에서 개최한 ‘불교사상에 있어서의 깨달음과 닦음-돈점 문제를 중심으로’ 라는 국제학술회의가 세상 사람의 큰 관심 속에 치뤄지면서 본격화되었다.
「선문정로」서언에서 성철스님은 “무릇 이설 가운데 일례는 돈오점수이다. 선문의 돈오점수 원조는 하택이며 규봉이 계승하고 보조가 역설한 바다. 그러나 돈오점수의 대종大宗인 보조도 돈오점수를 상술한 그의「절요」벽두에서 하택은 지해종사知解宗師니 조계의 적자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이는 보조의 독단이 아니요 육조 혜능이 수기하고 총림이 공인한 바이다. 따라서 돈오점수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은 모두 지해종도知解宗徒이다. 본디 지해는 정법을 장애하는 최대 금기이므로 선의 정안조사正眼祖師들은 이를 통렬히 비판하였다”고 서술하였다.
90년 학술회의에서 목정배 교수는 “깨달음은 이론적으로 이해된 지식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한번 깨달았다 함은 자기의 본성을 확연하게 깨달은 것이므로 한번 깨닫고나면 영원한 깨침이어서 다시 미혹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다”고 설명하였다.
이에 대해 박성배 교수는 “보조국사는 지해(앎)의 역할이 불교 수행에서 얼마나 좋은지 통찰한 분이었고 이를 위한 닦음의 문제를 중시, 선종에서 이단으로 기피하는 하택, 규봉, 종밀 등의 사상을 포용했다” 면서 “깨우침 다음에 생활에서 계속 이를 실천하고 닦지 않으면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회의가 끝나고 나서 「미주현대불교」등에서 지상 논쟁이 계속되었고 이번 민족사 세미나는 논쟁의 2라운드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세미나에서 가장 주목받은 두 사람의 주장을 들어보자.
이동준 씨는 “두 스님의 돈점관은 각각의 시대 현실에서 당면하고 있는 문제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곧 보조 당시에는 주변에 돈오와 점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았고 지금 성철스님 주변엔 쉽사리 자신이 깨쳤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했다. 김호성 씨는 “돈점 논쟁은 텍스트와 텍스트의 만남이고 논쟁이지, 도인과 도인의 대결이나 깨달음과 깨달음의 대결이 아니다”고 전제하면서 텍스트 비평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곧 기존의 돈점 논쟁은 이 텍스트 비평이 빠져 있어 오류가 많다는 주장이다.
이렇듯 불교의 수행에서 지고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깨달음에 대한 논쟁을 지켜보면서 관점이나 입장의 시비를 떠나 자칫 공허해질 수 있는 오늘날의 불교 풍토에 수행의 원점을 다시 살펴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자칫 전통적 관습이나 종파적 입장에 닫혀 버리기 쉬운 수행의 입장을 폭넓게 논의한다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겠지만, 깨달음의 돈점 논쟁은 앞으로 한국 불교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깊고 튼튼한 연구와 토론이 진행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