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길 산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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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문리 일기 - 현진
1992년 07월 125호
큰절에서 꽤 멀리 떨어진 암자가 바로 천자암天子庵이다. 산죽山竹이 듬성듬성 나 있는 산길을 시간 반 정도 걸었지 싶다. 초행길은 아는 길보다 지루함이 덜하다. 모퉁이 돌아서면 암자가 나타날 듯한 그런 산길을 자꾸 걸어온 셈이다. 가끔 산행길에 사람을 만나 목적지를 물으면 입을 맞춘 듯 대답이 한결같다. 조금 오르면 된다는 것. 사실 그 말을 다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훨씬 힘이 덜어지곤 한다. 내 목적지를 미리 알면 재미없다. 초행길을 걸을 때와 같은 기대나 설레임이 없다면 우리 삶은 물기 없는 나무처럼 시들시들 탄력을 잃고 말 것이다. 천자암은 중국 금나라 천자天子의 셋째아들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창건한 까닭에 붙여진 이름. 무엇보다 커다란 두 그루 향나무가 더 유명한 곳이다. 보조와 담당, 두 스님이 심었다는 이 쌍향수雙香樹의 유래 또한 믿기지 않는 전설.
노스님이란 말이 참 좋다. 큰스님이라는 말보다는 왠지 정겹다. 우선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노스님은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우리 집안의 어른이신 게다. 좋은 어른은 사람을 가려서 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해서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임제종의 법통을 이은 오조법연五祖法演스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에서 가슴깊이 와 닿는 보훈寶訓이 아닐 수 없다.
큰스님(長老) 가운데는 도력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람도 있으며 세력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사람도 있다. 마치 난새나 봉황이 날면 모든 새들이 좋아하나, 호랑이가 지나가면 모든 짐승들이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겉으로 따르는 모습은 하나로 나타나지만 그 품격은 천지 차이로 갈라진다.
어찌 우리 절집안에서만 통하는 말이겠는가. 어른은 많아도 어른다운 어른이 되기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일 게다. 노스님은 산문의 표상이란 말이있다. 그만큼 어른이 갖는 덕화德化는 산중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어른의 목소리가 그리울 때 언제나 뵐 수 있는 노스님이 산중에 계시다는 건 든든한 일이다. 천자암 노스님을 뵈었다. 걸망에서 가사를 꺼낼 동안 노스님은 무슨 경전을 두런두런 소리내어 읽고 계셨다. 경전을 치울 때 얼른 훔쳐보지 않았다면 화업경인지도 모를 뻔했다. “그래, 중노릇은 몇 년이나 햇는고.” “이제 겨우 육하六夏를 지냈습니다.” 자꾸 얼굴이 붉어 왔다. 그 동안의 공부라도 점검하면 한순간에 말문이 막혀 버리는 일을 또 당할까 싶어서이다. “육년근 인삼이로군! 뿌리를 든든히 내리려면 아직 멀었어.” 아직 초참初參인 내 병통을 아신 듯 꼬집으신 것이다. 노스님들을 뵐 때마다 마음 한쪽을 비우고 넉넉한 내 공간을 가지고 싶어진다. 어쩌면 노스님의 널따란 수행 공간을 들여다봄으로써 내 스스로 편안함을 얻으려는지도 모르겠다. 얼마쯤 수행이 익기까지는 육단심肉團心을 잘 다스려야 상기병上氣病을 막을 수 있다는 말씀은 둘도 없는 청량음淸凉音이었다. 말하자면 육단심이란 ‘욱’하는 성질 같은 것이다. 한 번씩 마음을 쉬지 못해 답답해질 땐 괜히 짜증이 나고 내 본분사 밖으로 감정이 기울게 된다. 사실 마음 공부는 수학 공식처럼 언제나 대입시켜 풀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닌 까닭이다. 참으로 무사인無事人이 되어야할 것 같다. 일상적인 활동이 어디에도 거리낌 없이 순수하게 몰입되고 집중되는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일이 우선 아닐까. 그래서 일 없는 가운데 분주함을 찾고 바쁜 가운데 한가함을 누릴 수 있는 참공부를 얻어야 되지 싶다. 그런 인연이 오기까지 내가 걸어야 할 도정道程은 아직 멀다.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조용해져야만 그 마음은 장벽과 같아서 스스로 도에 들 수 있다.
달마스님의 유명한 사구게四句偈. 달마는 안심安心의 실천 방법으로 벽관壁觀을 제시했다. 안심이 수행의 어떤 목표라면 벽관이란 그곳에 이르는 길 같은 것이다. 이 벽이란 결국 수행자가 도정에서 만나는 정신적인 절벽일 수도 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조그만 경계에도 분별심으로 쉬 흐려지는 게 내 수행 분상이다. 하물며 안심락安心樂은 잡히지도 않는 먼 얘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잡아함경에 부처님과 소오나 비구의 대화가 엿보인다. 바로 거문고 타는 비유.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조이면 어떻드냐?”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또 어떻드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슨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 말고 방일하지도 말아라.” 노스님도 이런 공부의 이치를 경험하신 듯 내게 일러 주셨다.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짓는다는 생각 없이 짓듯이 그 마음을 지어야 하는 게야.” 망상이 일어날 때 공부를 단단하게 조여야 한다는데, 난 아직 늦추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입장이다. 역시 노老수행자 앞에선 흉내도 낼 수 없는 풋나기밖에 되질 못했다. 큰절로 내려오는 길은 내리막길. 공부를 짓는 것도 오르막과 내리막의 요령처럼 적당한 완급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