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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인물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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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2년 07월 125호
청담선사. 이 시대 불교의 영광과 치욕을 한꺼번에 감당했던 스님. 때로는 치열한 구도자로서, 열렬한 웅변가로서, 불교 정화운동의 혁혁한 기수로서, 그리고 종단 최고의 지도자로서, 인욕과 고뇌와 절망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으며 살아야 했던 스님.
그래서 스님에게는 특이한 일화와 이야기가 많고 또 유례없이 추앙과 찬사를 받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종단을 망친 장본인이라는 비방과 부정의 화살도 수없이 받아야 했다.
스님의 행적과 영향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스님은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선사는 1903년 고도 진주에서 이화식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스님의 아명은 순호淳浩였다. 선사의 출생 시기는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 볼 때 가장 불안하고 불행한 시대였다. 조선은 이미 무척 쇠약해져 마침내 그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들 운명에 처해 있었으며 일본은 그 침략의 마수를 뻗치고 있었으니, 감수성이 예민했던 유년 시절의 선사는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민족적 비애와 울분을 지니고 있었다. 스님의 예민한 감수성과 연민의 정은 인생의 보편적이고 생래적인 고통과 고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이 세상에 대한 막연한 속상함과 우울한 사색의 늪으로 빠져들곤 하였다.
아버지 이씨는 맏아들인 선사를 일찍부터 교육시키려고 남강가의 봉연제鳳輦薺라는 한문 서숙에 보내 동문선습과 맹자와 논어들을 비롯한 한학을 배우게 하였다. 그러나 선사는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하기 보다는 언제나 까닭모를 생각에 잠겨 있기를 좋아했다. 이처럼 언제나 몽상에 젖어 있는 듯하다고 해서 선사의 어릴 적 별명은 ‘부엉이’였다. 순한 눈망울을 굴리며 어리석고 순진해 보이는 어린 선사를 아이들은 시시 때때로 골리고 또 놀려댔다. 어린 선사는 놀림을 당할 때마다 귀찮고 창피했으나 그들과 시비하여 다투거나 싸우고 싶은 생각이 도무지 없었다. 슬그머니 그런 짖궂은 동무들과 떨어져 언제나 조용하게, 명상하는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숙에서 글을 읽다가 쉬는 시간이 되어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부엉, 부엉, 부엉이야” 하고 고막이 찢어질 만큼 큰 소리로 놀리면서 그의 팔을 잡아서 끌어당겼다. 어린 선사는 부지불식간에 당한 일이라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때까지 당해 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덤벼들어 한참을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나중에는 돌과 부지깽이, 삽자루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돌발적인 사건이었다. 장독대 항아리가 부서지고 창문도 깨져서 서숙의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걸 본 선생은 노발대발하였다.
“이놈, 고약한 놈! 아무리 친구가 잘못했더라도 그렇지. 주먹으로 몇 대 치는 것은 모르겠으나 왈짜 같이 행패를 부리다니! 우리 서숙에 너 같은 독종은 필요없으니 당장 나가거라.”
그는 선생의 말이 떨어지자 곧바로 책보를 싸들고 나왔다.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부모님이 그에게 몇 번이고 간곡하게 “선생님이 잠시 역정을 내신 것이니 다시 서숙에 나가거라” 하고 사정하듯이 말했지만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부친은 하는 수 없이 그를 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시켜 주었다. 일본 사람이 담임을 맡은 이 학교는 소년 순호에겐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고리타분한 서숙과는 무척 달랐다.
새로운 학교 생활은 그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생각마저 변해서 그는 활발하고 명랑한 소년이 되었다. 그리고 이내 학업 성적도 좋아져서 우등생으로서 학동들을 이끌어 갔다. 그는 때때로 교정에 환하게 내리는 햇빛 같은 밝은 꿈과 새로운 미래의 희망을 펼쳐 보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과 꿈은 한낮의 여우볕처럼 잠시 머무르는 환영 같은 것이었다. 선사의 나이 열일곱 살 때 기미 삼일운동이 일어났다. 이 민족 누구나 그랬듯이, 스님도 일제에 억눌리고 응어리져 있던 약소 민족의 울분이 자연스럽게 항거 정신으로 일어났다. 독립이 무엇인지, 왜 만세를 불러야 하는지, 그 까닭을 알기 전에 한핏줄이라는 정서만으로도 만세 사건에서 주동자로서 앞장 섰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스님은 경찰에 체포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학동들 사이에서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선사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 주었으니, 곧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데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주의 학생이란 딱지는 진주 농업학교 진학과 일본 유학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선사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고나서 친구 여동생과 첫사랑에 빠졌지만,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열아홉 살 되던 해 다른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운명의 닻을 엉뚱한 곳에 내렸다.
그러던 어느날 울적한 마음을 달랠 겸 서장대西臧臺 기슭을 거닐다가 목이 말라 그 부근에 있는 호국사를 찾아가서 물을 얻어 마셨다. 한참 들이마시고 있는데 한 늙은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불쑥 화두를 던지듯 이렇게 물었다.
“왜 사람은 물을 마셔야 하느냐?”
선사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스님이 말했다.
“마음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요구하기 때문이지.”
“......”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
“마음이 뜨겁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만일 우리가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차갑다는 관념을 털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돌멩이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육체가 ‘나’라고 자각할 때 사람들은 의식주가 필요하고 또 그는 그 끝에서 죽음의 허무한 허울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마음에서 ‘나’를 발견하면 우리는 생사를 벗어 버릴 수 있다. 부처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욕을 벗어 버리고 마음을 찾은 사람이란 뜻이다.”
선사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이 말은 선사의 마음을 통째로 흔들어 놓았다. 선사는 그렇게 말한 노스님을 찬찬히 훑어 보았다. 무언가 수행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향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다 온 박포명朴圃明 스님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뒤부터 ‘마음’이란 말에 앞뒤가 막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벙어리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스님을 찾아 뵙고 ‘마음’에 대한 설법을 들었다.
스님의 설법은 알 듯 모를 듯하여 갈수록 미궁이나 안개와 같은 세계였다. 스님 말씀에 따르면, 인생이란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아니며 괴로운 것도 즐거운 것도 아니었다. 그 말씀은 결론적으로 상대 개념을 초월한 공空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서 왕궁과 처자와 부귀 영화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왕궁을 떠나 설산으로 들어가셨다. 수행자는 세속적인 인연에서 벗어나 해탈하려면 먼저 집착으로 얽 혀있는 집과 가까운 인연을 떠나야 한다고 설법했다.
노승의 설법은 들을수록 너무나 진지하고 마치 출가를 명령하는 듯 섬뜩하여 방황하는 청년 순호의 가슴에 낙인을 찍어 눌렀다.
“떠나라, 떠나라! 영원한 자유를 위하여 너의 그 질긴 인습의 굴레를 벗어 부처 같이 저 푸른 산으로 떠나라!”
그 목소리를 따르기라도 하듯 선사는 초가을 어느 날 말로만 듣던 합천 해인사로 출가의 발길을 옮겼다. 막 가을빛이 물드는 숲을 오가는 스님들의 모습과 새 소리, 물 소리, 범종 소리, 목탁 소리가 그윽한 자연과 어우러져 마치 딴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틀을 걸어서 출가하러 온 청년 순호의 열정은 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출가자로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첫번째 출가에서 실패하고 진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부모님과 아내는 다시 집을 떠날까봐 은근히 걱정했지만, 출가 의지가 꺾이진 않아서, 다시 떠날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폭풍 전야 같은 집안의 적막함은 청년 순호의 출가 의지를 더욱 굳세게 할 뿐이었다. 다시 포명스님을 만나려고 전라도 백양사로 떠나는 순호는 겨울 나그네의 황량한 심사로 이리저리 들새처럼 떠돌아다니며 방황했다.
먼 겨울길을 재촉하여 갔으나 막상 포명스님은 병석에 누워 있었다. 병들은 노승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 절망하여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마저 병석에 누워 죽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결국 이 두 죽음은 청년 순호에게 사바세계의 무상함과 허망함을 더욱 느끼게 해서 출가의 결심을 단단하게 다져 주었다.
그 당시 선사의 방황을 보다 못한 친구 박생광(작고한 동양화가) 씨가 일본행을 주선하였고, 선사는 그곳 병고현에 있는 송운사松雲寺에서 출가를 단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스님은 이 땅이 아닌 남의 나라 일본에서 수행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오 년 뒤,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고성 옥천사에서 그 당시의 석학 박한영스님의 문하로 재출가를 단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