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에 놓여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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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행 - 혜묵
1992년 07월 125호
혈경이라는 물건이 불러일으킨 묘한 느낌은, 신앙심이라든지 수행하는 종교로서 불교가 연상시켜 주는 것들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갖고 있지 않은 데서 오는 결핍감 같은 것이었다. 아, 그리고 우리가 불교인으로 존재하는 한 그와 같은 전제들에 대하여 비록 엉성한 것이더라도 동질감이나 토대를 갖고 있어야 했다. 나는 조계종의 중으로서, 한국불교의 전통 속에서 불교에 귀의한 불자로서 늘 그런 것들을 막연하게나마 해답이나 견해도 갖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비록 지금은 대답할 수 없는 미묘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부딪히는 숱한 모순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고 미래를 담보로 해결을 미뤄 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말 그대로 낙관적인 희망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나는 불교의 가르침과 그 해석, 그리고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해 의심하거나 모자람을 느꼈으면서도 내 자신이 불교인이라는 동일성에 대해서는 별다르게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와서는 그런 사실이 매우 난처하게 느껴진다. 현실의 불교에 의심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불자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도 불교에 대하여 신앙심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이 불교일까. 어떻게 해야 불교인다운지 모르는 불교인. 사실 나는 그러한 어정쩡한 자리에 서서 안팎으로 불교인 행세를 하고 살아 왔던 셈이었다. 이렇게 비약하고 저렇게 아우르면서 유지해온 한국불교의, 선종인 조계종의 출가 수행자라는 하나의 동일성.
맥적산 혈경을 직접 접하기 바로 전 중국에서 출판된 갈 조광葛 兆光의 「선종과 중국문화」라는 책에서-이 책은 한국에도 번역, 소개되었다-혈경에 대한 논평을 본 적이 있다. 혈경은 순수 종교적이고 미신적이며 계급 불교의 상징이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온 책 속에 그런 논평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런 종교적인 열정을 병태病態나 변태變態로 간주하는 그의 해석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선종은 결과적으로 중국 역사에서 실패하고 말았으며, 다만 상층 계급의 문화 속에 자기 분열적이고 이중 성격의 병태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라는 해석. 그의 책은 과거의 도식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중국 역사 속에서 불교나 선종의 역할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소장학자들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 불교 특히 선종이 중국 역사에서 걸어왔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자취들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북경에 잠시 머물 때, 젊은이들의 도움을 받아 북경 도서관과 서점, 출판사들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미리 준비해 간 목록들을 제시하고 그들의 의견을 청했다. 구식 학자들의 이름과 저서 목록을 대하는 그들의 표정은 몹시 냉소적이었다. 요즘 시대에 아직도 이런 사람, 이런 책을 보는 사람이 있냐는 투였다. 그것들은 어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어용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고 또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들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어용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만들어 간 목록들은 한국의 도서관에서 빨간 딱지를 붙여 금서로 분류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그 책들을 보려면 무슨 비밀 취급 허가인가를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도 중국도 모두 변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선입견의 헛점들을 발가벗기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게다가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급속한 변화의 결과로 한국 불교라는 이름 아래서 불교인들은 아주 새빨갛게 발가벗기웠다는 느낌이 든다.
혁명 이후, 중국 대륙에서의 불교 연구-종교 활동은 말할 나위도 없다-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심반동唯心反動, 유물진보唯物進步라는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원칙에 따라 불교는 유심이며, 유심은 반동이라는 등식으로 간단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렸다. (재미있게도 반동이나 진보 따위의 표현은 특정한 가치 판단을 담고 있다.) 그러나 유심이니 유물이니 하는 표현은, 적어도 불교학 내부에서는 학문의 권위를 빙자하여 가치 중립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의 철학자 풍 우란馮友蘭은 그의 중국 철학사에서 불교를 유심론으로, 그것도 극단적인 절대 유심론에 빗대어 해석하였다. 오늘날의 지적 풍토에서 그 같은 의미에서의 유심은 좋든 싫든 불교의 벗어버릴 수 없는 껍데기로 인정되어 왔다. 게다가 불교 문헌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불교 자체의 유심이란 말은 이러한 주장에 반박의 여지를 없애주는 듯도 싶다. 또한 불교를 유심이라는 심연에서 끄집어내어 보려는 다양한 시도들도 대개는 터무니없이 실패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표현이 어디에서 유래했든지, 예컨재 화엄각에서 이야기하는 유심과 풍 우란 또는 현대 중국의 학자들이 사용하는, 심지어 우리 자신들이 일상에서 쉽게 이해하는, 유심 사이에는 뜻밖에도 빈틈이 많은 것 같다. 어쨌든 사회주의 중국에서 이러한 이론을 주도하던 원로 학자들을 오늘날에는 다시 ‘어용’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매도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제 대학에서는 중앙당에서 일방적으로 하달하던 그런 유형의 교과서들을 사용하지 않는다.주 요 대학에서는 나름대로 저마다 교과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아무튼 현대 중국의 학자들이 불교를 봉건 계급에 복무한 반동이라고 부르든지 정상 궤도를 일탈한 변태라고 부르든지 한국의 불교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다시 한국의 불교인이라는 껍데기를 둘러쓴 채,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었으며 그런 역사 속에서 고유한 전통을 창조해 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현대 사회의 빈틈 속으로 모습과 색깔을 바꿔가면서 숨어들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쩌면 바깥에는 더욱 진지하고 고상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상품으로 치장되어 국제 시장에 전시되 일본 불교, 일본 선종의 모습은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한국 조계종의 물건들은 한결같이 조잡하고 거친 불량품들로 간주된다. 한국의 시장 경제가 일본을 따라 배우듯이 불교도 일본을 따라 배움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개발하여 내놓은 상품의 질과 내용이 다양하고 좋아져야 경쟁력이 높아져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으며, 그때야 비로소 우리 불교도 결핍감을 떨쳐버리고 자기 모습을 당당하게 거리에 내세우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의 모습을 애써 감추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자신의 동일성이나 불교인의 동질성 따위를 묻고 배우기보다는 상품의 포장술이나 판매 기술을 배우고 연마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일본 불교가 자신을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고 성공하기까지 기울인 노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 물건들은 때로 너무나 정교하고 예쁘게 포장되어 부처님의 가르침 그 자체보다 더 고결하고 쓸모 있어 보인다. 한국 불교는 한때 그 상품들을 가르침 자체로 여겨 공경하여 배웠다. 그러나 그 덕으로 이제 한국 불교도 상품이라는 것을 알 만큼은 된 것 같다. 중국의 호적과 일본의 스즈끼가 선의 본질을 놓고 유명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 내용이야 어떠했든지 그 논쟁 과정에서 호적은 자신이 불교의 신앙인이 아니라 학자임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반면에 스즈끼는 종교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개념과 이론들을 반복하면서 불교 수행자라는 자기 동일성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논쟁은 평행선을 그리며 표류하였다. 그들은 모두 학술이라는 이름을 걸고 학문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전제와 패러다임으로 이상한 게임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스즈끼의 불교는 오늘날 가장 성공한 상품으로 간주된다. 그는 학술과 수행을 함께 교묘하게 포장함으로써 자신의 상품 가치를 한 단계 이상으로 높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적의 물건은 이론이나 학술로서라면 몰라도 상품으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아니 아무도 그것을 상품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에서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불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도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논쟁을 벌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