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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함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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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산책 - 돈연 1992년 07월 125호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잡아함은 설한 내용이 다양하며 복합적이다. 초기에 전해졌다는 칠천칠백 개의 얘기는 잡아함이 방대함을 말해준다. 한가지 다행한 것은, 오랜 시간과 많은 역사적인 상황들이 있었는데도 놀랍도록 원형이 보존되어 전승된 일이다. 역사의 기록은 때때로 역사 기술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각색되고 윤색되어 사실적 가치를 상실한 채 전해진다. 가장 오래 전해질 수 있는 금석문이 가장 난해하고 체면 치레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다.
경전뿐만 아니라 모두 다 그렇지만, 사실 그 자체가 기록되고 전해진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격이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삶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의 인격이다. 부처님의 인격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법화경이나 화엄경이 부처님의 인격을 극대화한 방법, 현란한 사상의 체계와 위엄과 공경과 예배와 찬탄으로 극도로 장엄된 서술 방법보다는, 인간적인 여러 사실들이 솔직하고 소박하게 기록된 잡아함의 여러 설법에서 인생의 모습, 삶의 체취를 느끼는 것이 더 종교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긴 시와 짧은 시, 긴 경과 짧은 경, 이렇게 나누는 것이 경전을 심도있게 이해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고찰로 다양성에 눈을 뜨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 일대기로 나타난, 부처로서 삶의 지속성을 이해하는 많은 방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매우 일상적이고 단순한 것들을 종교의 가르침에서 얻고자 한다. 그것은 종교 스스로 종교적 욕구에 충실하여 종교에 요구하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간단 명료하다. 그것들은 현실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들로, 기쁨, 행복, 소유, 축하 들과 나쁜 일, 천한 일, 슬픈 일, 싫은 일 등 갈등과 고뇌를 함께 아파하고 이해하는 일들이다.
경전을 가까이 할 때, 설법을 형식대로 분류하는 방법이 때로는 내용의 이해를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법화경에서는 아홉 가지 설법형식인 구부경(九部經. 수다라, 풍송, 본사, 본생, 미증유, 인연, 비유, 고기송, 논의)을 말했지만, 문학적 완성의 형태는 역시 12부의 형식(十二部經. 수다라, 풍송, 본사, 본생, 미증유, 인연, 비유, 고기송, 논의, 천중사, 여시어, 자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잡아함은 12부의 문학적 분류로도 내용의 다양성을 합리적으로 구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시의 경우 열일곱 가지의 장단이 혼합된 형식 분류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경전이 설해진 대상이나 인원이나 장소가 거의 즉흥적으로 이루어졌고, 자연 발생적인데다가, 논리적인 전개가 아닌 대화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 점 또한 잡화경을 이루는 독특한 요소이다. 부처님의설법은 대부분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다. 부처님이 설법 대상을 그것이 논리적인 문제일지라도 차근차근 끝까지 이해시키려 하신 태도에서 성자로서 위엄보다는 교사로서 면모가 더 짙게 느껴진다.
문답형식의 짧은 시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셨다. 얼굴이 아주 고운 하늘 사람이 새벽에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물러나 앉았다. 그 몸의 광명은 기원정사를 두루 비추었다. 그가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물건이 땅보다 무겁습니까.
어떤 물건이 허공보다 높습니까.
어떤 물건이 바람보다 빠릅니까.
어떤 물건이 풀보다 많습니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답하셨다.
계율과 덕이 땅보다 무겁고
교만은 허공보다 높은 것
기억은 바람보다 빠르고
생각은 풀보다 많다오

그때 하늘 사람이 게송으로 말했다.
아주 오랜 옛날에도 이런 분 보았네.
열반의 체험 완전히 얻어
모든 두려움 이미 떠났고
은혜니 사랑도 초월했다네.
이 하늘 사람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라졌다.
문답 중복 형식의 시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셨다. 그때 얼굴이 아주 고운 하늘 사람이 새벽에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물러나 앉았다. 그 몸의 광명이 기원정사를 두루 비추었다. 그 하늘 사람이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타락하여 패망하는 길로 떨어지는 것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원컨대 세존이시여
그 패망하는 길의 문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곧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이기는 길은 알기가 쉽지만
패망의 길도 알기가 쉽다.
법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길
법을 비방하는 것이 패망의 길이다.

나쁜 친구들 사랑하고 즐겨하며
좋은 친구들 멀리 한다.
좋은 벗들에게 원한 맺으면
그것이야 말로 패망의 문이다.

착하지 않은 이를 즐겨 만나고
착한 이를 도리어 미워한다.
악을 좋아하고 선을 싫어하는 것
그것을 패망의 문이라 한다.

되질이나 저울질할 때 남을 속이면
그것을 패망의 문이라 한다.

장기 두고 바둑 두고 술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로 여자에 집착하며
재물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
그것을 패망의 문이라 한다.

여자가 스스로 지키지 않고
남편 두고 남과 어울리거나
남자가 그 마음 방탕하여서
아내 두고 다른 여자와 어울리거나
그런 가정 생활 꾸려가는 것
모두 다 패망의 문이다.

늙은 아내가 젊은 남편 얻고도
마음에 언제나 질투를 품고
질투 때문에 잠잘 때도 편치 못한 것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늙은 남편이 젊은 아내를 얻고도
그렇다면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언제나 잠을 즐겨 거기 빠지고
벗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고
게으르고 성내기 좋아하는 것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친구를 돈으로 사귀고
술과 음식에 빠져 절제가 없다.
과다한 소비로 돈을 물 쓰듯 하니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가진 것은 없는데 탐욕은 많다.
무사의 집에 태어났다 하여
절로 왕되기를 바라는 사람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진주와 귀걸이와 또 목걸이
가죽신 짚신 호화로운 일산
스스로 아끼고 장식하는 일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맛있고 흡족한 남의 음식 받으며
자기는 스스로 재물을 아껴
남의 것 먹고도 갚지 않으면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사문이나 또 바라문들이
자기 집에 들어와 청하더라도
그때그때 보시 않고 인색한 것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예를 갖추어 가서 밥을 빌어도
주지 않고 욕을 한다면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부모와 나이 많은 어른들
제 때에 받들어 모시지 않고
재물을 아끼고 쓰지 않으면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아버지, 어머니, 형과 아우들이
때리고 꾸짖고 욕설하면서
모시고 공경하고 사랑의 보살핌이 없으면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부처님이나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
집에 있는 신자나 출가 수행자들
헐뜯고 비방하며 공경하지 않으면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진실로 깨침의 덕이 없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스스로 일컫는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도둑
이것이 패망의 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 세상 패망의 길
나는 알고 보기에 말하노라.
그것들은 험하고 두려워할 길
지혜로운 사람은 멀리 피한다.

그때 하늘 사람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아주 오랜 옛날에 이런 분 보았었네.
열반의 체험 완전히 얻어
모든 두려움 이미 떠났고
은혜나 사랑도 초월했다네.
그때에 하늘 사람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뻤다. 부처님 발에 입맞추고 떠나갔다.
잡아함 제1279경

아주 오랜 옛날 이런 분 보았었네.
열반의 체험 완전히 얻어
모든 두려움 이미 떠났고
은혜니 사랑도 초월했다네.
이 게송은 잡아함 제48, 49, 50권에 걸쳐 실려 있는 많은 시들의 서곡이나 후렴처럼 관용화된 싯구이다.
이것은 내 생애의 할 일 끝났네
청정한 행위 지속되어
할 일들 이에 마치고
스스로 후유後有받지 않음을 알았네
이 게송은 잡아함의 이 끝구절과 함께 하나의 관습화된 정형구를 이루고 있다. 경전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후렴 같은 정형구들이 즐겨 쓰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시로 이루어진 말씀이지만 이 1279경은 ‘무거운 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생활 지침서의 내용이다.
여자가 스스로 지키지 않고,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어울리거나, 아내 두고 남의 여자와 어울리는 것, 가정 생활 그렇게 영위하는 것이 바로 패망의 문이라고 설하고 있다. 늙은 여자가 젊은 남편을 얻고도 질투 때문에 잠도 자지 못하거나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얻고도 스스로 의심하는 것을 또한 패망의 문이라고 설하고 있다. 잠, 게으르고 성냄, 좋지 못한 친구들과의 사귐, 술과 음식의 절제 없음, 낭비, 권력욕, 사치품의 사재기, 인색함, 종교 사업에 대한 무관심, 부모나 형제와의 불화 등 이러한 것들을 무처님은 현실적인 의미에서 패망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하고 계신다.
새겨 들으면 지중한 삶의 교훈들이지만, 흘려 들으면 잔소리일 수밖에 없는 것들, 이러한 가르침을 부처님은 설하셨다.
부처님 시대의 그늘이 오늘 우리 사회 한복판에도 드리워진 듯하다. 남녀 간의 풍속, 권력 지향과 과소비 문제가 이천오백 년 전에 겪고 본 사회 모습이 아닌, 오늘 이 사회의 병리적 모습으로 정확히 드러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뜻하여 가고 오는 소유 형태는 이것들의 범주를 벗어날 수없기 때문이어서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듯 현실 생활의 기초위에 절제의 구체적 지시 사항들이 들어있다. 남녀간의 탈선된 사랑과 잘못된 권력욕과 불화의 가정환경을 바로잡는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교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들이 왜 오랫동안 지배해 왔을까. 현실을 개선하려면 개인과 가정과 사회의 모든 문제에 중재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처님의 생활 태도가 오늘의 승단에는 없는 것일까.
왜 우리들 경전을 멀리하고, 부처님께서 이런 생활의 지침들에 대해서 설하신 일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던 것일까. 보광명전에서 설하신 저 화엄경의 무진 법문도 좋다. 연화장 세계에서 설하신 법망경의 심지법문도 좋다. 그러나 기원정사에서 하늘 사람과 나눈 이 인간의 일은 또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