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의 역사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이이화
1992년 07월 125호
일연(一然, 1206~1289)은 삼국유사의 저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많은 저술 가운데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일부 신화를 제외하고는 삼국유사 뿐이다.(일부 보주補註 있음)
일연은 지금의 경북 경산 땅에 사는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느 경우처럼 어릴 적에 출가했고 스물두 살때에 승과에 수석 합격했다. 그 뒤그는 전국의 절을 돌아다니며 정진을 거듭하여 고승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렇게 해서 나이 오십대에는 대선사로 추앙되었다.
대선사의 승계를 받은 뒤 왕의 부름을 받아 거처를 선월사禪月寺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보조국사普照國師의 계통에 들게 되었다. 이 당시 나라의 사정은 참으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최충헌은 여러 경로를 거쳐 무신 정권을 확립했는데 승려들은 줄기차게 반무신 항쟁을 벌여왔다. 특히 1217년에는 침입한 거란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동원된 승군들이 최충헌을 죽이려고 발길을 돌려 큰 싸움이 벌어졌고 이때 승군 팔백여 명이 죽었다. 무신 정권과 불교 세력이 이런 갈등을 빚을 적에 몽고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1232년 고려 왕실은 몽고의 침략에 장기전 태세를 갖추고 수도를 임시로 강화도로 옮겼고 또 이어 호국의 의미로 몽고군에 의해 경주에서 불탄 대장경판의 재조再彫에 착수했다. 삼십여 년 만에 이 일이 완성되자, 그는 낙성회落成會를 주재했다.
그 때 그의 나이 마흔 살이 넘어 있었다. 이럼 암담한 나라의 현실을 몸소 겪고 보니 그는 자신의 정진이 한낱 구두선에 지나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고려 왕실은 사십여 년 동안 강화도에서 버티다가 끝내 항복했으나 이와 달리 삼별초의 군사는 끝까지 몽고에 항거하여 강화도에서 진도와 제주도로 옮기며 항전하다가 최후를 마쳤다.
더욱이 몽고는 고려를 압박하여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벌에 나섰다가 무수한 인명만을 잃으며 실패를 거듭했다. 이런 일을 겪은 충렬왕忠烈王은 그를 불러 가까이 두고 설법을 들었다. 천언 만어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때 그는 삼국유사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칠십대에 중의 신분으로서 외전外傳축에도 들지 않는 역사책을 쓴 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자기 민족이 외침을 받고 지배를 당할 적에는 어김없이 자주 의식이 싹트기 마련이다. 고려가 몽고에 고난을 겪을 적에 오늘날 전해지는 민족 대서사시 두 편이 나왔다. 하나는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로 우리나라 역대 사실을 시로 읊었다. 여기에는 단군 삼국三國 발해渤海가 들어 있다. 다른 하나는 이규보李奎報 문집에 실려있는 동명왕편東明王篇으로 고구려 건국 신화를 시에 담았다.
일연은 이 두 민족 서사시를 분명히 읽었을 것이다. 그는 또 자기가 태어나기 칠십여 년 전에 이루어진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읽었을 것이다. 사대유학자 김부식이 자기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중국 중심으로 엮어 짐(朕, 천자의 호칭)을 과인(寡人, 제후의 호칭)이라고 기술하는 따위의 사대 의식과 단군-발해 그리고 민속-불승들의 이야기들을 빼버린 편파적인 기술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아홉 편으로 나뉘어 있다.
왕력편王曆篇에는 삼국과 가락의 왕대 및 연표를 만들어 놓았고 기이편紀異篇에는 고조선과 위만조선, 마한, 부여, 고구려, 백제, 진한, 신라, 발해, 후백제의 흥망 성쇠를 담았다. 흥법편興法篇에는 불상 불탑에 대한 설화나 사찰의 유래, 의해편義解篇에는 신라 고승의 전기, 신주편神呪篇에는 수행의 설화, 피은편避隱篇에는 숨은 승려들의 일화, 효선편孝善篇에는 효행과 미담을 실었다.
위의 각 편에 나타난대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 수록 내용이 전혀 다르다. 그는 지난 역사를 다시 쓰려 하기 보다는 삼국사기에서 빼버린 사실을 새로 담아 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기古記와 금석문金石文 등을 인용하기도 하고 때로 견문見聞을 수집해 놓기도 하였다.
그는 이 책 이름을 유사遺事라 했는데 이는 정사체正史體가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정사正史의 체계만을 갖추었다고 바른 역사가 아님은 새삼말할 필요도 없다. 흔히 삼국사기는 문장이 유려하고 체제가 잡혀있으나 삼국유사는 문장이 경색하고 잡다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참가치는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내용은 무엇보다 앞에 단군 사적을 고기를 인용해 수록하여 민족사의 시원始源을 밝힌 점에 큰 가치가 있다. 이것이 단군에 대한 유일한 최고의 기록이다. 만약 이 기록이 없었다고 해 보자. 우리는 건국설화를 잃은 민족이 되었을 것이며, 홍익인간의 이념이나 천손족天孫族의 자부심도 갖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음은 발해 역사를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포함시킨 것이며, 또 삼국의 건국 설화를 적어 고대 우리 겨레의 사상과 의식 상태를 전해 준 것이다. 특히 이 책에 수록된 십사 수首의 향가는 고대 신라인의 정서를 전해 주는 보고이다. 또 민간 전설은 당시 우리 겨레의 정서뿐만 아니라 의식의 원형을 알려주고 있다.
아무튼 이 책의 내용은 고대 역사 뿐만 아니라 고대의 신앙, 사랑, 풍속, 언어, 예술, 인생관이 망라되어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의 편린을 전해 주고 있다.
안계현 교수는 이 책에 대해 ‘삼국사기의 모습이 마치 요리해 놓은 채소와 같은 것이라면 삼국유사는 밭에서 갓 뽑아낸 흙내 나는 싱싱한 채소와 같은 것’이라고 비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비록 오늘날 전해지는 유일한 정사의 역사책이기는 하지만 사가史家가 멋대로 재단하고 왜곡한 상처투성이의 조각품이며, 삼국유사는 비록 엉성할지는 모르나 원형을 있는 그대로 간수하여 전해 준 자연의 암석과 같으리라. 우리는 이 책 속에서 고대인의 숨결을 느끼고 풋풋한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한 사상가의 시대적 고뇌와 민족 의식을 접할 수있다.
그의 서적을 적은 비명에는 그가 이 책을 저술한 사실이 빠져 있다. 그만큼 승려들도 이 책에 별 가치를 두지 않았다. 다만 그의 제자 혼구混丘가 마지막 권 첫머리에 그 저자가 일연임을 적어 두었을 뿐이다.
이 책 내용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어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단군신화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고기의기록에 따라 신수설神授設, 천수설天授說을 설정하면서 하늘에 있는 환인桓因을 불교의 제석천帝釋天으로 해석하는 등 불교적 색채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 기자箕子에게 조선을 물려주고 산신이 되었다는 것도 역사 의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점이다. 둘째는 많은 이야기 속에 불교적인 것을 중심으로 다루었고 불승 불탑에 대해 지나치게 비중을 두었다는 점이다. 유가 사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대로 역사서에 괴력난신怪力亂神의 내용을 쓰지 않은 것과는 그 뜻을 달리하기는 하지만 고유의 신도神道 등 민간 신앙이나 원시인 의식의 표상보다 불교 관계에 비중을 둔 탓에 불승의 의식을 완전히 벗는 데에는 일정한 의식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일부러 빼거나 삭제한 사실을 역사가의 안목으로 더욱 보충하거나 수정하여 다시 수록하지 않은 것도 지적할 점이다. 이런 점에 좀더 관심을 돌렸더라면 그 가치는 더욱 빛났을 것이다.
늘 그를 의지하던 충렬왕은 그에게 국사國師의 칭호를 주려 했다. 이때 그는 몽고에서 쓰는 국사를 거부하여 국존國尊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 뒤 그는 온갖 풍상을 겪은 끝에 여든네 살의 나이로 군위의 인각사麟角寺에서 조용히 열반했다. 지금 인각사에는 깨어진 그의 비碑와 함께 사리탑이 보존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에야 삼국유사는 간행되었다. 그 첫 간행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12년(중종7년) 조선 시대에 간행된 책이 전해지고 있다. 곧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한 조선 시대에 경주부윤慶州府尹이 새로이 발문을 붙여 간행한 것이다.
이는 유자儒者들도 이 책의 가치를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유자들은 영숭전永崇殿 등에서 단군을 기자 아래에 두어 국가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세종에서 세조대에 이르러 이를 수정해 제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정두경鄭斗卿 등에 단군이 찬양되었고 안정복安鼎福에 의해 단군은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 또 이 책에서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시킨 사실에 유의하여 십팔세기 유득공柳得恭은 발해사를 규명했다.
이런 것은 모두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어서 이것만으로도 그는 민족사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 뒤 일제 시대에도 이 책에 대한 연구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오늘날에는 문화인류학적인 접근, 민속학적인 규명이 아울러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그를 두고 누가 민속사학자, 민중사학자라고 부르는 데 인색하겠는가. 오늘날 그의 행적과 삼국유사에 대한 연구가 좀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