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내부에서의 의식의 대상은 바로 경험이다.
경험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하여 감수된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이 경험은 곧 개념화되어 의식의 대상이 된다. 흔히 우리는 몸밖의 대상에 의하여 의식이 성립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다. 우리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대상으로 할 뿐이며 몸밖의 대상은 인식하지 않는다. 마치 몸밖에 대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대상을 경험한 마음이 대상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식은 이미 과거에 경험한 인상印象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산이나 강을 보고서 그것이 산이고 강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산이나 강을 경험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경험되어 있는 인상이 인식속에 없다면 산이라는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이 산이라고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인식의 내용에는 산이라는 것을 경험한 인상이 없기 때문이다. 산이라는 대상의 인식은 인식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거울에 사물이 비치듯이 산이라고 개념화되지 않는 상태로 비칠 따름이다. 우리 마음이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지, 대상이 우리의 인식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인식의 대상은 우리 내부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몸밖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같은 대상을 인식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각자 감지한 인식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몸밖에 절대적 타자를 내세워 반드시 존재한다고 인식하면 그 절대적 타자는 존재하는 것이고, 느끼지 않거나 인식하지 않으면 절대적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자아가 있다고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식에 ‘내가 있다’는 사고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열 살 때의 자기나 스무 살 때의 자기가 같은 나 자신이라고 느끼는 것은 우리 의식속에 자아라는 관념이 인상지워져서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나 자신 속에 나라는 자아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고정 불변하지 않다. 의식의 대상인 경험이 일어나지 않으면 의식도 활동을 중지한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는 자아 관념이 없는 것과 같다.
아무튼 자기 자신에게 이러한 자아 의식이 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쌓아온 자기라는 자아 의식에 맞지 않는 참을 수 없는 인격의 모독이라든지 자아에 손해가 가는 것에는 강하게 반발한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자극에는 행복감을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이면에 작용하고 있는 자아의 이기심이랄 수 있다.
사실 우리 마음은 새로운 경험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마치 흡수력이 강한 솜처럼 대상 인식의 모든 경험을 흡수하여 없어지지 않게 보존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어릴 때의 기억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숙명통이 열리면 과거의 모든 일들을 알 수 있듯이 요즈음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좋은 보기라고 생각한다.
인간 개개인의 최심층의 마음은, 과거부터 경험하여 축적한 인상은 자연계와 거의 같은 하나의 끝없는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의 삶 자체는 마치 눈병 난 사람에게나 보이는 허공의 꽃과 같이 하나의 환상이나 꿈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생의 비밀을 모르는 채로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행복을 찾고 자유를 갈망하고 더더욱 괴로움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고통의 바다에 더욱 깊이 빠져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살아가는 중생인 것이다.
우리라는 오온五蘊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바로 연기하는 것이고, 고정불멸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실로 우리에게 자아라는 것이 환상에 불과함을 깨달으면 지나친 욕망과 그에 따르는 괴로움의 쇠사슬을 벗을 수 있다.
우리는 괴로움의 원인이 밖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건의 전개는 연기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괴로움도 연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눈이 매화를 볼 때 우리는 눈의 대상이 매화라고 인식한다. 말하자면 인식이란 눈과 눈의 대상인 매화가 접촉함으로써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인식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눈과 대상의 관계를 무시하고 대상 인식이 독자적으로 활동한다고 생각한다. 햇빛만 없어도, 밤에 전등만 없어도 사물을 보는 일, 곧 인식을 할 수 없는 데도 우리는 자기에게 고정 불멸하는 자아가 있어서 대상을 인식한다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없다. 마찬가지로 귀나 코, 혀, 몸의 감각 기관도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육조혜능은 ‘부처란 깨어 있는 것이다. 깨어 있음은 비쳐 보는 것이다. 비쳐 보는 것은 반야이다’고 설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비쳐보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것, 곧 부처이다. 그러므로 경전은 오온무아五蘊無我라고 설하고 ’반야심경‘은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설했다. 여기서 우리의 본마음인 반야가 완성되는 것이다. 반야란 모든 존재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이다. 인식과 같이 인식 속에 들어 있는 경험(習氣)이 인식의 대상으로 있는 한 진정한 대상 인식이란 없는 것이다. 식은 스스로 하나는 주관과 또 하나는 객관으로 나누어지므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관적 인식(직관)이나 의식의 추리 활동이 마치 객관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착각할 뿐이다. 그러나 반야는 마음의 평정 상태에 의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차리는 것, 곧 비쳐보는(觀照) 마음이다. 인식 속에 나타나는 경험 같은 상태가 되어서 대상에 반응하더라도 습기로써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마음이 과거 습기에 물들어 있더라도 관조하는 힘이 순숙純熟해지면 대상에 반응하는 것이 반야지혜로 바뀌어 간다. 그래서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습기가 사라진다(無念). 그러므로 습기로 이루어진, 안경이라는 인식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 마치 허공에는 달이 하나뿐이지만 또 다시 두번째의 달이 나타나는 허구에 진실성을 부여해서 있지도 않는 두번째 달을 추구하는 괴로움은 사라진다. 그러나 관조하는 마음이 대상에 대하여 조금도 반응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다만 반야지혜의 상태에서 계속 반응한다. 마치 거울이 대상에 반응하여 어떤 물체가 그 앞에 오면 그대로 비추지만 그렇다고 거울속에 무엇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그 물체가 사라진다고 하여 거울 자체에 무슨 변화가 오는 것도 아님과 같다. 곧 개똥은 거울에 비쳤다고 해서 거울에서 냄새가 난나든지 더러워진다든가 하는 일은 없으며, 아름답고 향기로운 연꽃으로 바꾸어 비췄다고 해서 거울이 깨끗해지고 향기로워지는 것도 아니며, 넓어지는 일도 좁아지는 일도 없다. 반야지혜로 관조하는 마음, 그 자체는 조금도 더러워지거나 깨끗해지지 않으며, 생함도 멸함도 없는 청정심 그대로이다. 반야의 회복이야말로 자아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진정한 자신의 본질을 회복함과 동시에 개개인이 겪고 있는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문제의 해결 방법은 오로지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상을 관조하는 길이다. 화두든 비파사나든 자신의 내부를 되비쳐 보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