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전쟁, 일본과 불교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시론 - 일문
1992년 07월 125호
인간들은 왜 언제부터 서로 싸우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평화의 조건은 무엇인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이해하라”는 리델하트 경의 제의에 우리는 동의해야만 한다.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 속성이 어떻든지, 전투에 직접 참전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는 “전쟁은 지옥이다”라는 한마디면 족한 정의일 것이다. 콘라드 로렌츠에 따르면, 지금부터 사십만 년 전쯤에 살던 직립원인인 북경인은 불을 보관하는 방법을 알았고, 그 불로써 자기 형제들을 구워먹을 줄 알던 프로메테우스였다. 불이 규칙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첫번째 흔적 옆에서 잘리고 불에 그을린 북경인의 뼈가 발견된 것이다.
아더훼릴의 전쟁의 기원이란 책에 나오는 이 글을 읽으며, 고대 원시 공동체사회의 목가적 평화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이미 사람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삶을 살았음에랴.
1960년에 초기 신석기 시대에 해당되는, 고대 누비아의 나일강 주변에 있는 묘지에서 시체 쉰다섯 구가 발견되었다. 그때에도 인간이 놀랄만큼 야만인이었음을 알리는 표시들이 발굴자들을 슬프게 하였다. 여기서 발굴된 해골 가운데서 한 사십 퍼센트쯤은 머리 부분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화살촉에 의한 것이리라는 짐작이다. 그 묘지에 있는 해골 가운데에서 성인 남자와 여자는 거의 절반 가까이가 날카로운 석기에 찔려 죽었고, 어린애는 열한 명 가운데 네 명이 그랬다. 결국 우리는 이 묘지에서 선사시대의 전쟁에 관한 최초의 광범위한 증거를 얻은 것이다. 곧, 전쟁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았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난 6월 15일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 법안이 일본 중의원에서 통과되었다. 이제 일본은 지난날의 어두운 그늘에서 과감히 벗어나 세계평화(?)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자위대는 사십칠 년만에 자위가 아닌 타위를 위하여 캄보디아에서 평화 유지 활동에 들어갈 전망이다. 평화를 위해서!
평화를 소리 높여 외치며 이웃을 도와주고 싶어 몸부림치는 일본열도의 기류를 불안스럽게 지켜보면서 우리가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동아시아를 침략했던 일본이, 지난 사십칠 년 동안 갈고 닦아온 비장의 칼을 빼들고 세계평화를 부르짖으며 아시아 대륙에 다시 상륙하고 있다.
물결 치는 양자강 강물에는 마치 유목流木처럼 시체가 흔들리고 있었고, 강변에는 시체가 끝없이 첩첩이 쌓여 있었다. 그 수효는 수천, 수만이라고 하는 엄청난 수효에 이르렀고, 그 시체들은 남경에서 피난해 온 민간인이 기관총과 소총의 무차별 총격 속에서 힘없이 죽어간 대학살의 현장을 생생하게 말하고 있었다. 총격이 끝난 뒤에는 첩첩이 쌓인 시체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놓았는지, 시체들은 물에 타서 민간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가운데에는 어린 아이들의 시체도 무수했다.
이것은 남경성에 입성한 다까시로 모리이찌라는 한 일본군 병사가 하관에서의 인간인에 대한 학살 사건을 증언한 내용이다. 1937년 12월의 남경 침공의 와중에서 일본군은 이십만 명도 더 되는 중국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그때 남경의 참극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중국인들이 바로 자기의 코 앞인 캄보디아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어떤 느낌으로 바라볼 것인가? 사실 일본 세력의 팽창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며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서,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방위비 예산이 세계 2위인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 일본의 그런 군사력은 이미 자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막강한 전력을 바탕으로 일본열도를 벗어나 주변으로 그 힘이 뻗어 나가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해마다 1천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무역흑자로 말미암아 일어남직한 통상 마찰과 무역 보복이 두려운 일본이 그동안 꾸준히 강화하여 비대해진 군사력의 활동 범위를 확대하며 해외에서 힘의 배출구를 찾고 있다. 이제 서릿발 같은 일본도가 경제 문제에 대한 주변 나라의 불만의 목소리들을 잠재워 나갈 것이다. 늘 불안감을 주던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이제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일본 군사력 강화의 명분은 소련과 중국 같은 사회주의 나라에서 받던 군사적인 위협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 나라의 군사적 위협이 눈에 띄게 사라진 지금에도 일본은 군사력 강화에 오히려 더욱더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PKO법안이 통과된 다음날 워싱턴에서는 미국과 러시아가 현재의 핵무기 가운데 삼분의 이를 줄이는 대규모 전략 핵무기 감축계획에 합의하였다.
온 세계가 군비 축소의 길을 나아가고 있는 이즈음에 오히려 거꾸로 무장을 강화해 나가는 일본의 움직임에 그 어디보다도 민감할 수밖에 없는 나라는 바로 우리 한국이다. 팽창된 일본 군사력이 뻗어나갈 수 있는 일차적인 목표가 한반도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세력 팽창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우리의 준비 자세가 필요하다. 이제 한반도의 남과 북은 더 이상 적대 관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의한 적대감을 청산하고, 남북이 민족 대단결을 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북한 목조르기 정책에 편승하여 자행하고 있는 이즈음, 우리 정부가 북한에 대하여 펴고 있는 정책들은 동족에 대한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한편, 그와 더불어, 우리는 또 건강하고 튼튼한 사회구조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자면 먼저 광범위한 민주개혁이 단행되어,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반민주적인 요소들을 척결해 나가야 한다.
“대조선국 수원 화산 용주사 승려 석상순은 삼가 대일본의 대존각 각하께 치하옵고 절하옵니다. 우리 불교는 우리나라에 있어 지극히 비천하여 (승려들이) 서울 시내에 들어오지 못한 지 어언 오백여 년이 되는지라 항상 침울하게 지내더니 매우 다행스럽게도 이웃나라와 교류가 이루어지매 대존사 각하께서 이 만리 밖에까지 베푸신 자비의 크신 은덕을 입어 우리나라 승려들로 하여금 오백 년 동안의 원한을 쾌히 풀게 하시어 이제 비로소 서울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실로 우리나라 승려들이 다함께 감사히 여기는 바입니다.”
1895년 4월에 승려의 입성 금지 조치가 해제되자 용주사 승려 석상순은 일본 승려 좌야佐野에게 이와같은 감사장을 보냈다. 조선 왕조의 척불정책 아래에서 잔명을 이어오던 조선의 불교계는, 일본 승려를 내세워서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자 종교적인 신분 해방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불교국가 일본에게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는 제국주의의 잔혹한 본질은 보지 못하였다. 일본과 일본 불교계야말로 한반도에서 불교의 재흥을 도모하는 데에 믿음직스러운 조력자쯤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인식 아래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대하여 조선 불교계가 특별한 거부반응 없이 수용하고 협력한 것이다. 그 첫걸음이 이러했던 일제시대 불교의 역사는 민족과 역사 앞에서 부끄러운 과거로 기록될 것이다.
장로 대통령을 소리 높이 외치며 한반도에 기독교왕국을 건설하겠노라고 설치는 기독교 세력과 그 배후 세력인 미국에 대하여 대항할 수 없는 무력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한국의 불교도들에게 일본이 침략자의 본질을 숨기고 다시 일본 불교를 첨병으로 내세우며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올 때 우리 불교계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과연 불교적인 이기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민족 전체의 미래를 염려하고 위하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요즈음 불교계를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을 버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