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구통수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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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문리 일기 - 현진
1992년 02월 120호
율원律院 지대방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선방에서 겨울안거를 지내는 스님이 들려 주었는데 지대방에 모인 대중 모두가 차 마시는 것도 잊고 이야기에 빨려들었다. 지대방에 둘러앉아 가끔 듣는 수행담은 군대 시절 이야기만큼이나 재미있다. 이야기 하나를 만들기 위해 군데군데 내 생각을 끼워 넣었다.
다들 그를 절구통수좌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이다. 스님이 선방에서 목숨을 내놓고 한참 정진할 때에는 꼼짝을 않았단다. 한 번 가부좌를 한 채 입선入禪에 들면 방선放禪 죽비가 울릴 때까지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았으니 그런 이름이 붙을 만도 했다. 태산처럼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 초참初參 스님네들이 절로 힘을 얻었을 만큼 정진력이 대단했다. 그러던 절구통수좌에게 조그만 토굴이 하나 생겼다. 신도라고는 몇 없는 암자의 주인이 된 셈이었다. 가끔 기도하러 오는 보살네들이 있어도 스님은 몇 마디를 하지 않는다. \"잘 오셨습니다.\" \"공양 드시고 가시지요.\" 보통 이 정도의 말이었다. 친절하고 자상한 모습보다는 수행자 특유의 묵직함이 스님의 살림살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내일 있을 법회에 쓸 찬거리를 사서 암자로 가던 중이었다. 동구에서 조그만 일이 벌어졌다. 오토바이가 길을 가로막은 채 서 있어서 스님이 탄 차가 지나가지를 못하게 되었다. 그 옆 솔밭에서 주인인 듯한 청년 셋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치워달라는 스님의 말에 그들은 기분 나쁜 웃음을 보였다. \"어디 중놈 신통력으로 치워 보시지.\" 절구통수좌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무엇보다 신통력을 보여줄 참이었다.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오토바이를 끌어다가 논바닥에 처박았다. 그것도 두 대를 한꺼번에. 그 뒤의 일은 뻔한 일. 지금까지 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절구통수좌였다. 청년 셋을 몇 대 쥐어박고는 토굴로 돌아왔던 것이다. 사흘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장작을 패고 있는 스님의 토굴에 때아닌 오토바이의 굉음이 들린 것이다. 바로 며칠 전에 당한 녀석들이었다. 이번에는 덩치가 좋은 동료들을 데리고 온 것으로 보아서 그냥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의 입에서는 입에 담지도 못할 막말이 마구 튀어나왔다. 일촉즉발의 순간, 항우장사라도 완력으로는 도저히 당해내기 힘든 상황에서 절구통수좌는 오히려 침착했다. \"잠깐 기다리시오.\" 방으로 들어간 스님은 좌구坐具를 바르게 하고 장삼 위에 가사를 둘렀다. 마치 속탈한 노승처럼 지긋이 눈을 감고 앉았다. 밖에서는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방에까지 들어왔을 때, 절구통수좌는 담담하게 그리고 힘있게 말했다. \"나를 치시오. 일전의 내 잘못을 인정하오.\" 일단의 무리들은 순간 멈칫했다. 너무나 당당하게 앉아 있는 절구통수좌의 모습은 그들의 기를 꺾을 만했다. \"빨리 나를 죽이시오.\" 머뭇거리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재촉했다. 잠깐 뒤에 방안의 싸늘한 침묵을 깬 것은 바로 그들의 목소리였다. \"스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 한 사람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 결국 몽둥이를 들지 못하고 그들은 산을 내려갔다. 그런 인연으로 오히려 절구통수좌와 친하게 된 그들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그때 조용히 앉아 계시는 스님의 모습에서 어떤 말할 수 없는 힘을 느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갔던 뒷절의 부처님 생각이 불현듯 나더군요. 도저히 스님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절구통수좌의 평소 수행력이 그들을 감화시킨 것이다. 과연 그때 무슨 말이 통할 수 있었을까? 살아 있는 법문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수행자의 당당한 호기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행에서 비로소 배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리적인 힘은 법력法力에 당하지 못한다. 결국 이러한 힘은 많은 이론이나 지식에서 얻어진다기보다는 수행자의 본분에 철저할 때 나타나는 자기의 울림일 게다. \"옛스님들의 행장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수행을 쌓으면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군요.\" 내가 그때를 당했더라면 어떠했을까? 비굴해졌을지 모른다. 절구통수좌의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끝낸 선방 스님은 이런 말을 하며 마지막 찻잔을 비웠다. \"수행자의 진정한 상像을 그 스님에게서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그 스님이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우리가 말하는 \'중물\'이 물씬 풍길 때, 수행자는 비로소 제값을 한다는 사실을 무던하게 앉아 있는 그 스님에게서 확연히 깨달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