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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 불교계의 상황과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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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2년 02월 120호
해방을 전후한 한국의 시대 상황은 무질서와 혼란 그것이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서 그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꿈꾸었던 동아시아 공영권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고,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제 2차세계대전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자 한동안 거세게 몰아닥쳤던 제국주의도 일단락 되고 세계는 새로운 질서를 향해 물결치고 있었다.
이미 해방 전부터 이 땅은 새로운 이념에 휩쓸려 있었으니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곧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처럼 찾은 광복의 기쁨을 나누고 민족의 대동 단결을 꿈꾸기도 전에 분열과 편가르기라는 시련을 던져 주었다. 하루에도 여러 개의 신흥 정당이 생겨나는가 하면 대낮에도 테러가 자행되고 정치적 음모가 난무하는 무법천지 그대로가 그때의 세태였다. 그러니 경제와 사회상이야 어떠했는지는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당시의 한국 불교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당시의 불교 상황을 자세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좀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1911년에 일제가 사찰령을 제정하고 30본산제가 실시되면서, 한국 불교를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하여 종론宗論을 통일하고, 원흥사에 30본산 회의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30본산제만 성립되었지 각 본사간의 유기적인 연락 관계가 결여되어 공동적인 일원화를 이루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므로 곧 연합사무소를 각황사에 설치하여 그 인가를 총독부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이 연합사무소는 이름 그대로의 30본산의 연합사무소만을 집행하였을 뿐, 전국 사찰을 통할하고 모든 승려를 통제하는 권한은 없었다. 이리하여 실질적인 중앙통제기관이 필요하기에 이르렀다.
이 즈음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은 청년 승려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젊은 승려들이 30본산제와 그 연합제규의 불합리함을 비판하며 들고 일어났으며, 좀더 강력한 중앙통제체의 재구성을 촉구하였다. 또 이와 함께 조선불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신진 소장 승려들이 주동이 되어 현행 제도의 혁신을 부르짖었다. 특히 이들의 주장은 신성한 불교가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는 주장과 함께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는 한편 사찰령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움직임들에 따라서 30본산 주지들도 총회를 갖고 기존의 30본산연합사무소를 종무원 체제로 바꾸기로 의결하고 허가를 신청했으나 총독부가 허락하지 않아 이 체제도 유명 무실하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신진 승려들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자체 내의 자각들에 따라서 전국 사찰을 통할할 중앙통제기구로서「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총무원」이 각황사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서른네 개의 본산 말고도 많은 본산이 합심하여 총무원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대하는 본산들이 힘을 합쳐 이들이 1922년에는 각황사에「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을 설립하고 인가를 받았다.
이와 같이 동일한 건물인 각황사 안에 전혀 상반된 종무 기관 두 개가 총무원과 교무원이라는 간판을 각각 내걸고 사무소를 두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로부터 두 종무 기관 사이에는 알력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들은 서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정통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 뒤에 총무원과 교무원은 한지붕 밑에서 서로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상대방을 불법 단체라고 하며 간판을 떼는 등 다툼이 계속되었으나, 1925년에 서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양원은 하나로 뭉쳐서 재단 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되었으며 이로써 일제하의 한국불교교단은 비로소 통일적인 중앙 통할의 종무기구를 이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8년 12월에 전국승려대회 발기회를 갖고 이듬해 1월에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었다. 이 승려 대회에서 종원과 교무원 원칙 및 교정회법과 종회법들을 제정했으며 조선 불교 교정 일곱 명(김환응, 서해담, 박한영, 이용해, 김동선, 김경운, 방한암)을 선출하여 종단 내 최고의 원로 기관으로 하였다. 또 의결 기관으로서 종회를 두고 종회는 각 본말사 평의원회에서 뽑은 종회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무 기관으로서의 중앙교무원에는 서무부, 재무부, 교학부를 두었다.
선교양종이란 종명에 따라서 합법적이고 통일적인 중앙통제기관을 갖기는 하였으나 전국 사찰에서는 이를 전적으로 찬성한 것도 아니었다. 사무적인 것을 통할하였지만 아직도 선명한 종명과 특징 있는 종지와 그리고 좀더 강력하고 유기적인 중앙 통제적 체제가 요청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보다 근본적인 어떤 새로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총본산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리하여 1941년 봄에는 태고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종명을 조계종이라고 결정하였다. 일제의 사찰령 이후 지금까지 조선선교양종이라고 불리우던 종명을 조계종이라고 한 것이었다. 또한 1941년 4월에는「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사법」의 인가를 얻었는데 태고사 사법은 전 16장 130조였다.
조계종으로 발족한 종단에서는 제일대 종정에 한암대선사를 추대하고 같은 해 6월에 총본사인 지금의 조계사, 곧 태고사 종무원에서 종무를 시작하였다. 곧 한암 스님은 종정 취임을 승낙하였고 그 해 8월에는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얻고 9월에는 공무 고문으로 김경산, 김구하, 강대련, 송만공, 송만암, 장석상의 여섯 사람을 추대하고 종무원장에 이종욱을 선임하였다. 이로써 조계종의 이름 아래 총본산인 태고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사찰과 승려가 총결속을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내려오던 조선 불교 조계종도 1945년 8월 15일, 조국 해방과 더불어 한국 불교 조계종으로 자세를 재정비하여 새로운 출발을 보게 되었다.
해방된 그 해, 1945년 10월에 전국 승려대회를 열고 일제의 사찰령과 지금까지의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사법들을 폐지하고, 새로운 한국 불교 종헌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해방된 이 땅의 새로운 한국 불교 조계종 초대 교정敎正에 박한영 스님을 추대하고 중앙총무원장에 김법린이 선출되었다.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본 불교의 내용적인 잔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히 1954년부터 거세게 일어난 비구와 대처간의 불교 정화 운동 같은 내부의 불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화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기로 하고, 먼저 1945년을 전후한 해인사의 실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해방와 더불어 해인사에서는 전국의 선승들이 모여 좀더 수행에 진력하기로 하고 당시의 송광사에 조실로 주석하고 계시던 절구통수좌로 이름을 드날렸던 효봉선사를 모시고 와서, 46년부터 가야총림을 해인사에 설치하고 그 방장으로 추대하였다.
사실 이 가야총림은 불과 네다섯 해(육이오사변이 터지기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유지되었으나 한국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수행 운동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이 가야총림은 오늘날 대부분의 큰스님들이 수행 정진하였던 진원지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짧은 수행 기간 동안 가야총림에서 수행 정진했던 스님들의 존함을 거명하면 효봉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청담, 인곡, 고암, 서옹, 지효, 월하, 구산, 영월, 자운, 영암과 같은 근대 이후 한국 불교를 대표할 만한 기라성 같은 선승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다음 호부터는 해인사에 머물렀던 현대 고승을 중심으로 써 갈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