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의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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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본각
1992년 02월 120호
출가의 다짐
나는 때로는 나 자신이 걸어온 지나간 추억을 즐겨 되돌아본다. 1976년 가을에 많은 상념을 끝내고 재출가를 결단하였을 때, 나는 마음 속 깊이 출가자다운 성聖을 지향해 가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절 집에 널리 퍼져 있는 속된 삶으로부터 나 자신을 다스리는 자세를 잃지 않을 것을 나의 초발심에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세월을 지내온 지금에 와서는 과연 성속聖俗의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감보다 두려움이 앞서고 있다. 우리의 생이 정진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이처럼 출가의 다짐이 늘 미흡함으로 끝났다고 여겨질 때, 나는 애써 나 자신을 반성하는 뜻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떠한 것인가를 재음미해 보려고 노력한다.
내 삶 속의 화엄경
그리하여 출가자로서의 자세를 가다듬으려 할 때, 그것의 기준을 경 율론의 삼장을 배우고, 계 정 혜의 삼학을 실천하는 것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문제삼아 보고는 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그 무엇인가에서 의지처를 찾아야만이 삭발염의한 승가의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출가 정신의 의지처로서 소의경전所依經典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사교입선捨敎入禪만을 강조하였고, 교를 버리기에 앞서 진정한 의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가르치는 데에는 게을리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금강경」에 \"법도 오히려 버릴 것이라면, 어찌 하물며 비법에 집착할까 보냐\" 라고 하여, 일체의 법, 비법으로부터의 초탈을 가르치고 있듯이 결국은 일체를 다 버림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귀결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부처님의 일생이 그 법을 가르치는 것에 진력하셨듯이 우리도 먼저 법을 알고 법을 초탈해 가는 순서와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사교입선의 자세를 올바로 세워가야 될 줄로 믿는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고, 그 정신으로 무장하기 위해서 팔만대장경 속에서 자기의 소의경전을 하나쯤은 찾아 내어야 할 것이다.
중국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智儼스님도 스물일곱의 젊은 시절에 자신이 의지해 나가야 할 경전을 고르기 위하여 장경각 앞에서 입지발언立志發願하여 화엄경을 무심히 손에 쥐었다고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뒤에 지엄 스님은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의 모든 규범을 화엄경 속에서 배우고 실천해 왔던 것이다. 지엄의 이와 같은 전기를 모방해서가 아니라 나도 강원의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하고 자신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을 갖고자 할 때에, 나 자신이 왠지 반야적般若的인 삶보다는 화엄적華嚴的인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의 소의경전으로「화엄경」을 선택했던 것이다. 나의「화엄경 」연구의 첫 걸음은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 매이지 않고 이러한 화엄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부처님과의 대화
벌써 지나간 추억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나의 유학 시절 화엄 사상에 근거한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 여름방학 내내 텅빈 학교 연구실에서 화엄경을 독송하면서 여름 석 달 간을 보낸 적이 있다. 아침밥을 일찍 해 먹고 자전거에 도시락과 신수대장경 제10권을 싣고 집을 나서서 구택驅澤 공원을 가로질러 연구실에 도착하면 창가엔 벌써 공원 숲의 그늘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나의 독경 소리도 함께 울려 퍼지는 아침이 매일처럼 계속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처럼 부처님이 내 곁에 계시면서 법을 설해 주시며 함께 대화를 나누시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경구의 하나하나는 참으로 환희로웠고, 출가자로서 삶에 새로운 지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부주不住간의 보살행」,「일심의 불가사의함」그리고「보살행의 끝없음」도 그때에 새삼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화엄경」의 십행품 속에는 보살의 부주도不住道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유컨대 뱃사공이
이쪽 언덕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저쪽 언덕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또한 그 한가운데도 머무르지
아니하여,
모든 사람을 운반하여 쉬지 않듯이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사의 이 언덕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열반의 저 언덕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며,
더욱이 생사의 중류中流에도
머무르는 일 없이,
끝없이 일체 중생을 실어날러
열반의 안온한 세계에 이끌어
인도한다.
그와 같은 보살의 마음에는
일체 차별스런 마음의 집착을
여의었으니,
그것은 보살이 법계가 둘이 아님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이니라.
나는 이 경문을 접할 때마다, 말로는 표현해 내기 어렵지만 보살의「부주의 도」가 어떤 것인가를, 또한 그 실천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해서는 알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충만해 있는 자신의 출가 모습을 반성해 보고는 하는 것이다. 또한「화엄경」의 입법계품속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구도의 행각이 미륵보살의 인도로 보현법계에 들어감으로 해서 그 종착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보현보살은 다시 처음의 문수보살에 참배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선재동자는 뜻을 가다듬고 지나온 구도의 역정을 다시 행각하려고 마음을 다질 때, 문수보살은 스스로 팔을 뻗쳐 선재동자의 다함이 없는 구도의 자세를 칭찬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경문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선재 동자의 구도의 강인함과 함께 보살행이라는 것은 결국 끝이 없는 실천행이란 그것을「화엄경」이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진다. 다시 말하면 출가자의 실천의 길은 어디에 이르면 마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실천행만이 참된 보살의 길임을「화엄경」은 제한된 언어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화엄경」과 만남으로써 끝없는 보살행의 모습이「부주의 도」로서 표현되고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한 계획과 사량분별이 얼마나 의미없는가 하는 것도 다시금 깨우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