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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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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의 얼과 멋 - 여연 1992년 02월 120호
어린시절, 큰마당에서 마구 뛰어 놀다가 싫증이 나면 허름한 행랑채 문간을 지나 할아버지가 계시던 사랑채의 뒤란으로 가만히 숨죽이며 들어가 본다.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툇마루, 그 건너편 뜨락에 묵직한 돌로 만든 암갈색 돌 노주露柱(돌로 만든 세숫대야의 한 가지)가 풀밭에 놓여 있고, 거기서 할아버지가 손을 씻는 모습을 자주 훔쳐보고는 했다.
할아버지가 마실가고 계시지 않는 날에는 늘 이슬방울 같은 물기를 머금고 있는 그 녹색 이끼가 잘게 낀 돌대야에 물을 가득 붓고는 반짝 빛나던 사금파리 조각을 가라앉게 한 다음에 박하 잎새를 따다가 둥둥 배를 띄우며 놀던 유년의 하늘이 이젠 아득하기만 하다.
이렇듯이 어지간한 옛날 집에서나 절집안에서 흔히 보아오던 이 노주마저도 지금은 플라스틱 세숫대야에 밀려 세월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져갔고 지금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녹슬은 유물이 되고 말았다.
사원에서는 뒷간을 다녀오면 으례 손을 씻는데 이 노주에 빗물을 받아 모아서 쓰거나 또는 한철(삼 개월) 동안 뒷간 청소를 담당한 소임자인 정통이 매일 새로운 물을 길어 와서 거기에 담아 두고 여러 대중 스님들이 손을 씻을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 노주는 높이가 58.8센티미터이며, 거북의 길이는 58.2센티미터, 대야의 입지름이 33.3센티미터로서 거북의 등에 팔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동그란 그릇을 올려 놓은 모양이다. 그릇의 밑바닥 가운데에는 구멍을 뚫어서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하였다.
가을날이면 울긋불긋 물들어 흩어진 잎새들이 여기에 빠져서 흔들리며 또 한 가지 아름다움을 안겨주던 그 시절. 지금은 잊혀져간 시간 속에서 절 집안에서나 볼 수밖에 없는 우리들 살아가던 소박한 지난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