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 박한영 스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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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서정주
1992년 02월 120호
1934년 5월 말, 첫여름이 성큼 다가설 무렵, 나는 난생 처음 다듬이질로 다진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한 벌 얻어 입게 되었다. 좋은 명주로 안을 댄 이 두루마기는 고종의 상궁이었던 최덕순催德順이라고 하는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것인데, 이분은 바로 나를 석전 스님께 안내해 준 손위의 친구인 미사眉史 배상기씨의 양어머니셨고 또 불교도라서 나의 불경 학인 생활을 축하하는 뜻으로 마련해 주신 것이었다.
나는 그 두루마기를 입는 순간, 금방이라도 예쁜 날개가 돋아날 것만 같아서 며칠 뒤에는 석전스님의 방을 찾아가서, \"금강산에 계신다는 송만공 스님한테 가서 한동안 참선 공부를 해볼까 합니다\" 하고 여쭈게 되었다. 송만공 스님이 우리나라 선의 대표적인 큰스님이라는 것을 나는 일찍이 들어서 알고 있었으므로 그 밑에 가서 참선 공부를 해 볼 생각을 꾸준히 지녀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때를 골라서 스님께 그 뜻을 말씀드리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무래도 그 최상궁이 주신 날개와 같은 모시 두루마기의 유혹인 듯 싶다. 나는 그때 아직도 열아홉살짜리 기분쟁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뜻밖의 이야기를 들으신 노스님은 나를 비스듬히 보며 웃으시더니,\"참선이 어디 그렇게 아무나 하는 것인가? 먼저 불경들을 잘 배워서 불교가 무엇인지부터 알 만큼 안 뒤에 하는 것이지, 그냥 그렇게 함부로 가서 하는 것이 아니여!\" 하고 반대하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친김이라 물러서지 않고, \"참선을 직접 해 보아서 시원치 않으면 되돌아오더라도 작정한 일이니 승락해 주십시오. 이번 기회에 꼭 금강산도 구경해 보고 싶습니다\" 하고 떼를 써 보았다.
그랬더니 노스님은 비로소 얼굴에 그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시면서, \"자네, 금강산 구경이 하고 싶은 게로군. 그래, 차로 갈 텐가? 걸어서 갈 텐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대뜸 \"걸어서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뜻밖에도 스님은 선뜻 그렇게 하라고 대답하셨다.
며칠 뒤에 나는 송만공 스님에게 보내는 우리 노스님의 편지와, 또 금강산까지의 사이에 있는 큰 절들의 주지 스님들에게 내 숙식을 당부하는 또 하나의 전갈을 받아 가지고, 드디어 훌훌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여러 날을 걸어가자면 이게 좋겠다\" 하시면서 석전 스님은 자신의 여행 때마다 신으시던 운동화를 내게 물려 주셨고, 또 노자로 주머니에 있던 돈을 몽땅 털어서 내게 주셨다.
나는 그 예쁜 모시 두루마기 위에 새 밀짚모자도 하나 사서 머리에 쓰고, 날 듯이 내금강의 장안사까지 육백 리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양주 망월사에서 하룻밤, 연천 심원사에서 하룻밤, 철원 도피안사에서 하룻밤, 금성 천불사에서 하룻밤 그리고 그 다음 날 밤중 아홉 판에는 마침내 내금강의 장안사에 다다랐는데, 그 동안에 발바닥이 온통 물집투성이가 되어서 몹시 쓰렸으나, 나는 그것 때문에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며칠 동안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반가웠고, 새삼스럽게도 그리움 같은 것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나 새들이나 나비떼들이 모두 신화와 같이 다가왔던 그 경험이 그리워서 나는 그 뒤에도 홀몸의 방랑길을 곧잘 나서게 된 것이다.
장안사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난 다음날 아침이 되자 나는 절룩거리며 만공스님이 계신다는 마하연摩何衍으로 찾아갔으나, 이때 마침 만공 스님께서는 영원암靈源庵에 가 계신다고 하여, 저 유명한 명경대明鏡臺의 맑은 못물가를 지나서 그 영원암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날 해가 질 무렵에야 영원암에 도착했다.
붉고 흰 작약꽃이 여러 천 송이 피어나서 잘 자란 처녀성處女性의 냄새를 그윽이 풍기고 있는 언덕 뒤의 먹기와집 한 채에서 한 패의 젊은 여승들의 낭랑한 웃음소리를 이끌고 있는 송만공 스님을 나는 비로소 뵙게 되었는데, 그 풍모를 지금 돌아보건대 흡사 저 일본을 항복시킨 미국의 맥아더 장군 비슷한 잘생긴 오십대 나이의 갸름한 얼굴, 바로 장한壯漢의 모습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참선 공부는 만공스님과 나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나는 그가 호의로 주는 약간의 노자를 얻어서 금강산 구경이나 좀 하고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러고는 그냥 온 게 미안해서 석전 스님한테는 다녀왔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연줄연줄로 와룡동이라는 곳에서 한 국민학교 아이의 가정 교사 노릇을 하며 그해 가을까지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늦가을의 어느 날, 내가 있는 와룡동 집으로는 석전 스님이 보내신 학인 스님 두 분이 찾아들었다. 배상기 씨에게 여기 있는 걸 들어서 알았다고 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서 석전 스님에게로 갔다. 스님은 다시 나를 보시고는 내 속을 다 알아보신다는 듯이 소리내어 웃고 나서는 \"내 이럴 줄 알았다. 정주, 자네는 중이 될 사람은 아니지만, 시인 같은 것은 하나 됨직한데, 자네 그러지 말고 내가 교장으로 있는 우리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하는 게 어떤가? 거기서는 불교뿐만 아니라 동양 문학의 고전들도 잘 골라서 가르치고, 서양 철학의 대강과 서양 문학이나 영어까지도 꼭 필요한 만큼은 가르치고 있으니, 자네 같은 사람에게는 좋을 거여. 마침 우리 강원에서 그 학교에 입학을 바라는 사람 가운데에는 자네보다도 일본말 실력이 모자라 그 학교의 강의를 들어내기가 어려운 사람이 몇 있으니, 지금부터 자네는 그 사람들에게 그걸 훈수하면서 지내다가 명년 봄에 함께 그 학교에 들어가게. 그게 좋을 것이여\"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듬해 4월에 그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을 했는데 ,지금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스님의 마음의 눈은 이때 이미 나의 잔정을 빤히 다 들여다보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이 학교에서 한동안 공부한 덕으로 그 뒤 시인으로서의 공로를 가산加算받아서 동국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그것으로 우선 밥줄을 이을 수가 있었으며 오늘날까지 내 문학을 해 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