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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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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92년 02월 120호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이와 사가 아득하여 분별함이 없으니
열 부처님 보현보살 같은 큰사람의 경계이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조건들을 인연이라고 하고, 그것이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날 때에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우리가 짜맞추어 실천해 가는 속에서도 결과는 확률상으로 언제나 반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원천적으로 이십오 퍼센트의 확률에 기대를 거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연기론에서는 그 모든 조건이 백 퍼센트의 확률을 담는 것이라야 한다는 전제로 시작합니다.
이 두 구절은 위에서 말한 것을 매듭지은 부분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대상으로서의 삶과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열반도 우리 각자와 동떨어진 개념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생사와 열반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生과 死에는 性이 없고 열반을 가지고 性으로 삼는다, 그러나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열반에도 性이 없어서 生死를 가지고 性으로 삼는다, 이는 열반에 머물 때에 늘 생사에 노닐며 생사에 노닐 때에 언제나 열반에 머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열반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진성眞性을 알았다는 것이며, 이 진성이란 그 스스로의 고유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법의 性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티끌 속에서도 시방세계를 포함하는 性이 있고 한 생각으로 무량겁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생사와 열반에 性 없음을 理라 하고, 性 없는 생사와 열반을 事라고 합니다. 생사와 열반은 본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緣을 따라서 나에게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생사를 연으로 하는 까닭에 열반이 갖추어지고 열반을 연으로 하는 가운데에 생사가 갖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사와 열반이 바로 나의 몸이요, 너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치란 진실의 도리를 말합니다. 사물에게는 정당한 조리條理이며, 도리에 맞는 지취旨趣를 말합니다.
사상이란 일의 상태로서 나타난 것, 어떤 사정 밑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사건 또는 사실의 현상을 말합니다.
이치가 드러나지 않고 그 내면에 감추어진 내용이라면 사상은 드러난 상태로서 밖의 현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理는 만 가지 덕을 모두 더한 것이요, 事는 천 가지의 공교로운 것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현상은 끝이 없지만 이치는 일도一道라고 하였습니다. 이치가 근본이라면 사상은 자취인 것입니다.
위에서 생사와 열반이 본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緣에 의지한다고 했으나 연기緣起에 자성이 없으므로 무성無性이 연기입니다. 이렇게 연기가 무성인 것이 理요, 무성한 연기가 바로 事입니다. 이렇게 理도 진성眞性의 理요, 事도 진성의 事입니다. 그러므로 아득하여 분별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드러나지 않는 모습이 바로 분별이 아닌 상태입니다.
이치와 현상이 아득하다, 분별이 없다 하는 것은 어느 것이 이치요, 어느 것이 현상이라고 비록 천만 가지로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매우 깊은 진성은 그 자성을 지키지 않는 데에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이것을 진성의 이치는 묘용妙用이 끊임이 없고 진성의 현상은 法과 法이 늘 융합해서 분별을 떠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를 신라의 원효 스님은 기신론소에서 파도는 전체가 물이요, 물은 전체가 파도일 뿐이므로 파도에서 물을 제거할 수 없듯이 물에서 파도만을 따로 떼어 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十佛과 普賢의 경계라고 합니다.
법계도에서의 법성계에 이 열여덟 구절까지를 자리행自利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여 그 얻은 바의 증득을 선언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리란 자기 자신의 내면적인 완성을 뜻합니다. 이러한 자리의 관점에서는 理와 事가 둘일 수 없습니다. 분별할 수 없는 무이無二의 상태를 밝힌 경지입니다. 반면에 이타利他가 있어서 그 외적인 작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자리가 이루어짐이 없이 이타행은 온전하게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타를 행하지 않는 자리란 참된 내면의 완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법성계가 이러한 자리의 행을 강조함으로써 끝났다면 그것은 화엄경의 내용을 반밖에 드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불과 보현의, 경계를 말라고 합니다. 열 부처님이란 가고오며 머무는 모양이 없는 실상의 차원높은 경지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열 부처란 각기 다른 부처님 열 분이 아니라, 열이란 일체 모든 것을 다 갖춘 원만한 숫자로서의 열입니다. 곧 부처님이 갖추신 열 가지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무착불無着佛이니 세간에 머물면서 정각을 이루어서 세간의 어떠한 일에도 장애를 받지 않는 공덕이 갖추어져 있는 부처님입니다.
둘째, 원불願佛이니 부처님께서 원하는 대로의 공덕을 갖추고 사실대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경에서는 태어난 까닭이라고 했는데 그 뜻은 중생의 원을 따라서 가지가지의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셋째, 업보불業報佛이니 결정적인 믿음에 의한 업의 과보가 부처님입니다. 경에서는 믿기 때문에 나타나신 부처님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지불持佛이니 지란 모든 解와 行을 갖추었다는 뜻으로 끊임없이 깨달음과 자비로운 행위가 간직된다는 뜻입니다. 경에서는 따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수순한다는 뜻은 지혜와 자비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다섯째, 열반불涅槃佛이니, 언제나 고요한 상태로 동요, 산란, 흥분, 초 조들이 다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경에서는 영원에 다다른 상태라고 했습니다.
여섯째, 법계불法界佛이니 부처님은 어디든지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경에서는 곳곳마다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일곱째, 심불心佛이니 부처님의 마음은 깨뜨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에서는 편안하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덟째, 삼매불三昧佛이니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고 바르게 하는 것으로써 경에서는 한량없이 집착하지 않는 까닭이라고 합니다.
아홉째, 성불性佛이니 성이란 법성으로서 결정된 것을 말합니다. 경에서는 결정된 까닭이라 했습니다.
열째, 여의불如意佛이니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뜻대로 공덕을 베풀기 때문에 경에서는 두루 덮는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을 일컫는 명호는 많습니다. 여기에서는 주로 화엄에서의 행경 십불과 해경 십불이 있습니다. 해경 십불은 진실한 지혜로써 법계를 보아 모든 현상이 부처님 아닌 불 아님이 없다고 보는 열 가지의 부처님 불을 말합니다. 행경 십불은 수행의 결과로 깨달은 부처님의 경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 설명한 열 가지 명호입니다.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외향심外向心의 화현化現입니다.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은 첫째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둘째 부처님을 칭송 찬탄하고, 셋째 널리 불 보살께 공양하고, 넷째 자신의 지난날의 모든 잘못된 업을 참회하고, 다섯째 남들이 잘 하는 일을 함께 기뻐하고, 여섯째 언제나 진리가 퍼지기를 간청하고, 일곱째 언제나 불 보살이 이 세상에 머물러 계시기를 청하고, 여덟째 언제나 부처님을 따라 공부하고, 아홉째 늘 중생의 뜻을 따르고, 열째 이 모든 일을 세계와 중생이 다할 때까지 지속하기를 발원하는 것입니다.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외향심으로 나타나서 선재동자에게 이 십대원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경의 열 부처님과 보현의 열 가지 원은 다 함께 참된 자리는 이타에 의해서 이룩된다는 사실을 표현한 경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할 때 참된 자신의 깨달음도 함께 이룩되어진다는 사실이 이와 사의 둘을 벗어나지 않는 경지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