밉잖은 북한의 핵사찰 거부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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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임재해
1992년 02월 120호
우리 한반도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찍부터 핵문제와 어지간히 깊은 인연을 맺어 왔다. 핵무기를 사용한 최초의 전쟁에서부터 최근의 핵사찰 문제에까지 그 인연은 좀처럼 끊이지 않고 있다. 1945년 8월에 미국이 일본 나가사끼와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떨어뜨린 결과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 와중에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지만, 그때부터 지금껏 한시도 핵무기의 그늘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1945년 당시에 일본을 강타한 원자탄은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과 살상력으로 일본 천황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조선의 독립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성큼 들이닥쳤다. 이처럼 8.15 해방은 조선 민중의 주체적 역량에 의해 자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핵폭탄이라는 반생명적인 살상 무기로부터 뜻밖에 주어진 것이므로 온전한 해방과 독립을 성취할 수 없었다. 일제의 억압과 수탈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남북으로 분단되는 새로운 비극을 맞았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부터의 독립과 더불어 소련과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새로운 제국주의에 남북한이 제각기 복속되는 신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핵폭탄은 일본의 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듦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세계 제패라는 엉뚱한 망상에 제동을 거는 한편, 신격으로 섬기는 천황의 절대적 권위를 인간으로 끌어내려 주는 긍정적 기능을 발휘했다. 결국 원폭은 신화와 망상의 꿈에 빠져 있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꿈속에서 깨어나게 하는 충격을 주는 각성제 노릇을 한 반면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국권 회복에 목말라 하던 한국 사람들에게는 목마름을 해소할 정도로 약간의 주권을 주는가 했더니 곧장 허리를 분질러 민족 정기를 꺾어 버리고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약소 분단국으로 만들어 놓는 구실을 하였다.
일본에 때린 원폭이 결과적으로는 한반도의 허리에서 폭발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어, 전범국 일본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게 하는 반면에 오히려 피침국 한국은 반신 불수의 장애자로 토막지워 버린 셈이다. 그러므로 인류 사상 핵무기에 의한 가장 깊고 치명적인 상처는 우리 한국인이 입었으며, 반 세기에 걸쳐 계속해서 그 상흔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금도 일본은 \'비핵 3원칙\'을 고수하며 핵무기를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사용하지도 않는다 하여, 핵개발에 투자도 하지 않은 채 미국의 핵우산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있는 까닭에, 공짜로 핵우산의 보호는 받되 직접적인 핵무기의 공격을 받을 염려는 없는 것이다. 일본은 가만히 앉아서 핵무기가 지닌 양면성, 곧 자기를 보호하는 기능과 남을 해치는 기능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마음껏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사정은 다르다. 이미 핵무기 때문에 나라가 두 동강 났을 뿐 아니라, 그 반쪽 한 곳에는 국토 곳곳에 미국의 각종 핵무기들을 심어 두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핵무기를 자체 개발하느라 법석이라고 한다. 그리고 북한이 남침을 시도하는 날에는 핵무기 사용도 불사할 것이라는 협박을 미국 정부 당국자들이 공공연히 해오던 터였다.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 터지는 날에는 한반도가 핵전쟁의 실험장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한반도에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고 남북이 대치 상황에 있는 한 핵전쟁의 위험은 늘 우리 국민들을 가위누르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 핵전쟁이 터지는 날은 곧 한민족의 역사가 끝장나는 날이자 세계지도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지워야 하는 날이다.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깨우친 사람들은 기회있을 때마다 핵문제를 들먹이며 핵무기의 철수와 반핵 운동을 벌이는 한편, 한반도의 핵무기 배치 상황을 사실대로 밝힐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미국 정부에 예속되어 있는 우리 정부는 꿀먹은 벙어리 노릇을 하거나, 아니면 미행정부의 교활한 발언을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를테면 핵무기 유무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보상의 이유라며 핵무기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모순된 발표를 얼굴하나 붉히지 않고 공공연하게 해댄다. 미국의 관리들이야 어차피 그네들의 국익을 위해 한국을 핵전쟁의 볼모로 잡고 있으니 시치미를 딱 잡아떼더라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제쳐 둘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 당국자들은 제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고 민족의 생존이 달려 있는 문제인데도 철없이 그들의 장단에 맞장구만 치는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는 꼴이다.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무기들은 공공연한 비밀로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는 상황인데, 북한까지 핵무기 개발로 사회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핵무기 개발을 극구 부정하고 있으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그들의 정보 체계를 통해 끊임없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기정 사실화하고, 국제적 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국제원자력기구 가입과 핵확산방지조약에 따른 핵안전협정 서명을 통해서 핵사찰을 강요하고 불응시에는 선제 핵공격을 감행하려는 엄청난 대응책까지 까놓고 발설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세계의 모든 여론이 북한의 핵개발을 손가락질하며 핵사찰을 요구하는 판국이지만 북한은 이에 흔들리지 않고 고집스레 항변하고 있다. 종래에는 줄곧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두고 국민들의 반공심과 경계심을 자극하더니, 요즘은 우리 정부도 덩달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들먹이며, 국민들에게 새삼스레 반북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제 나라 국민학생들까지 위안부로 징발한 일본에게 \'일북한수교\'를 구실로 핵사찰의 압력을 가해 주도록 요구하고 있다. 마치 형제끼리 다투었다고 해서, 제 어린 딸들을 무지막지하게 겁탈한 이웃동네 망나니 모가비를 보고서 위험한 무기가 있을지도 모르니 아우의 집 살림살이를 샅샅이 뒤져봐 달라고 당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어쨌든 처음에는 핵무기 개발을 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주장이 한갓 발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특히 국제원자력기구에는 가입하면서 기어코 핵안전협정 서명을 하지 않으며 핵사찰을 거부하는 것을 볼 때, 그러한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받아들이는 전제로 남북한 동시 핵사찰을 주장하는가 하면, 마침내는 남한에 배치되어있는 핵무기 철수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편견과 의혹을 가진 상태에서 듣게 된 북한의 전제 조건들은 자신들의 핵무기 개발을 은폐시키려는 교활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의 주장이 거듭될수록 엉뚱한 고집처럼 들려서 미욱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지난 연말께부터는 북한의 핵사찰 거부 고집이 밉잖게 들릴 뿐 아니라, 그들이 내건 전제 조건들은 썩 잘 내세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북한의 고집과 전제에 따라, 남한에 배치한 모든 핵무기들을 철수시키겠다고 하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를 얻어 냈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발표는 거의 자동적으로 한국 정부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는 듯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남한에는 더 이상 핵무기가 없으며 남북한의 동시 핵사찰을 수용하자는 성명을 냈다.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서 핵무기 유무에 관해서 긍정도 부정도 않는다던 한미 두 정부의 억지 논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졌을 뿐 아니라, 그 동안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비밀이었음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작태가 연출된 셈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글쓴이는 한미 두 정부의 핵철수 발표를 두 손 들어 환영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은폐해 왔던 핵무기 배치를 솔직하게 시인한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시건방진 자존심을 꺾고 모순된 안보 논리를 스스로 철회하지 않는 한 그러한 결단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평화적인 원자력 이용의 결과물인 핵 폐기물을 보관하고 연구하는 시설물을 짓겠다고 하며 각종 특혜와 지역적 이익을 내세워도, 주민들이 총궐기하여 죽어라고 반대할 정도로 \'핵\'에 대한 과민한 공포감을 지니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한반도의 핵철수 결단이야말로 민족을 살리고 동북아의 안정을 다지는 중요한 행보라는 데에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글쓴이 개인적으로도 한반도에 더 이상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이제야 우리 민족의 핵무기의 볼모에서 해방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내심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초에는 남북한의 새로운 결단이 있었다. 북한은 가까운 시일 안에 핵안전 협정에 서명하고 핵사찰을 받기로 하였으며, 남한은 올해 팀스피리트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결국 북한의 고집은 이 땅에 외국 군대가 와서 전쟁 연습을 하는 팀스피리트 훈련까지 중지시키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므로 전제 조건을 내세워 끝까지 핵사찰을 거부하며 고집을 부리던 북한의 행동이, 처음에는 미욱하기 그지 없었으나 지금 다시 생각하니, 결코 밉지 않은 행동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외고집이 의도된 것이든 우연한 것이든 결과적으로 한미 두 정부의 용기 있는 결단을 가능하게 했으며, 한반도로부터 핵무기를 제거시키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대견하고 당당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로써 핵과 인연을 영원히 끊어버리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