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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불교 영화를 감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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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현응 1992년 02월 120호
LA에서 열리는 남북불교자대표회의에 참석하려고 태평양 상공을 지나는 기내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제목은 \'그대 삶을 변호하면서(Depending your life)\' 였다. 죽음 뒤의 세계를 풍자한 코미디 영화였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보아 넘기다가 차츰 흥미가 나면서, 마음속에 다가서는 게 있었다.
\'아, 이게 바로 불교 영화가 아닌가?\'
LA 광고 회사 직원인 주인공이 생일날 교통 사고로 죽어서 다음 세계로 가기 전에 머무는 \'심판의 도시\'에 머물면서 재판정에서 자신의 삶을 변호하는 이 영화는 불교인에게는 익숙한 내용과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심판의 도시는 바로 명부冥府이고, 심판관과 변호사는 각각 염라대왕과 지장보살이고, 재판정에서 판사가 지나간 삶을 재현해 보이는 스크린은 업경대와 같은 구조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다음 생을 결정하는 기준-이 영화에서는 삶의 세계가 삶의 의식 수준에 따라서 무수히 있다-지난 생애에서 삶의 순간순간을 얼마나 두려움 없이 대처해 나갔는가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야말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며, 무지는 가장 큰 악덕으로 지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학교에서 친구들과 다툴 때, 시험치를 때, 사랑할 때, 회사 생활할 때에 가졌던 갖가지 두려웠던 순간들을 검사가 재현해 보이면서 그의 무지를 공박하는데 주인공과 변호사는 그에 대해 변호해 나간다.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모든 두려움을 여의고, 무지로부터 벗어난다\'는 반야심경을 떠올리고, 십이연기로 표현되는 중생 윤회의 실상이 무명(어리석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이른바 우리 나라의 불교 영화에 대하여 새삼 생각해 보았다.
불교 잡지와 신문들은 작년에 나온 손꼽을 만한 불교 영화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를 뽑았다. 한 사미승의 사랑과 번민을 그린 이 영화는 \'만다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들과 함께 불교 영화에 대한 우리의 틀에 박힌 상식을 대변하는 영화이다.
오히려 불교 영화라기보다 불교적인 소재를 빌린 극영화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지만, 작품의 성취도와 흥행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우리에게 불교 영화란 절과 승려가 등장하고, 신앙과 수행을 담거나 그에 부수되는 번민들이 어우러진 것으로 느끼게 하기에 족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불교 영화에 대한 인식을 고쳐주는 몇 편의 할리우드 영화들을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상영된 \'사랑과 영혼\'이나 \'스위치\' 같은 영화를 보면서 과연 불교 영화라고 생각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신의 섭리로서가 아닌 인과응보의 결과로써 다음 생의 삶을 결정하고, 이승과 저승에 가지 못하고 떠도는 증음신의 이야기를 담은 \'사랑과 영혼\'은 불교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라서 그렇다 치고, 인과응보와 현세와 내생을 다루지만 특히 남녀의 생이 뒤바뀌는 \'스위치\'에서 유마경의 줄거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마디로 우리가 틀에 박힌 불교 영화에 허덕일 때, 할리우드에서는 절, 승려, 따분한 교리들을 담지 않고도 현대 감각의 불교 영화를 많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서 요즈음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할리우드의 영화들에서 불교적인 세계관을 찾을 수 있다 함은 지나친 억측일까?
상상과 아이디어야말로 영화 산업의 기본 요건이다. 시나리오의 만성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방화의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불교적인 깨달음\'과 \'상상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그 어느 예술 장르보다 자유로움이 마음껏 주어지는 영화에서야말로 불교의 세계가 활짝 꽃피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세계관이 창의적으로 표출되어야 하는 게 어디 영화뿐이랴! 문학이나 미술 등의 예술 영역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 자연 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될 것이며, 그에 대한 사례와 새로운 가능성은 얼마든지 발견한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파묻혀 집착하는 행위는 사구死句이며,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써 표현하는 것을 활구活句라 하여 비로소 인정하는 불교 정신은 한마디로 \'창의 정신\'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회하는 중생의 삶에서 모든 것을 불교의 교리나 소재에 집착하는 타성을 버릴 때, 활구는 늘 새롭고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며, 또한 거기서 진정한 불교와 만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