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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18 17:35
순일선원 도덕경 칼럼
 글쓴이 : 니르
조회 : 9,708  

노자의 도덕경

아래의 글은 순일자료실(www.soonil.org)의 순일금강경9장 속에 있는 내용중의 일부분 입니다.
그중 노자의 도덕경에 관련된 부분만 여기에 실었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요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명(名)이라는 글자는 금강경에서도 이미 많이 이야기 하였다. 즉 현상을 이야기 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쓰인다.
도덕경(道德經)의 도는 불교의 공(空)을 말한다. 즉 실상을 말한다. 덕(德)은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덕은 불교로 보자면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즉 도(공)는 완전한 혜 즉 각성(주관과 객관이 없이 온전한 깨어있음)을 말하며 덕(지혜)이란 그 각성의 현상에서의 나타남이다. 지혜는 주관과 객관이 있다. 허나 지식 역시 주관과 객관이 있다. 즉 둘 다 생각한다. 허나 차이점은 지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즉 마음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며 현대적인 용어로 보자면 집착과 저항 없이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쓴다. 즉 시시비가 없다. 노자로 이야기 한다면 위(爲)가 없다. 즉 조작 되거나 작위 되거나 하는 꾸밈이 없다는 것이다. 허나 지식이란 꾸밈이 있고 저항과 집착이 있는 것이다. 이유가 개아의 의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꾸밈이요 저항이요 집착이기 때문이다.
머무를 수 없는 것을 머무르려고 하는 것이 이미 저항이요 집착이다.
열역학 제 1 법칙에서 말하였듯이 이 현상이란 무엇 하나도 머무를 수 없는 인연 화합의 흐름인 것이다. 머무를 수 없는 것을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자체가 이미 불가능이기 때문에 고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경이란 불교식으로 본다면 공색경이 되는 것이다.
헌데 “공색”에서 “색”은 색즉시공한 후에 다시 돌아온 공즉시“색”의 “색”이다.

도가 도이려면 늘 도이면 아니 된다.
현상(名)이 현상(名)이려면 늘 현상(名)이면 아니 된다.

열역학 제 1 법칙을 다시 한번 보자.
Enegry can not be created or destroyed, merely changing a form to another form in Universe.
에너지는 우주 내에서 창조되어지거나 파괴되어질 수 없다. 다만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할 뿐이다.(반야심경요의에 자세히 이야기 되어져 있다. 참조)

“창조되어지거나 파괴되어질 수 없다”는 부분이 불변이며 불생불멸이다. 즉 도(공)이다.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할 뿐이다”는 부분이 변이며 즉 생멸의 겉모습을 띄운다는 것이다. 즉 명(색)이다.
불변이 변이며, 불생불멸이 생멸이라는 이야기다.
전체로서는 불변이며 불생불멸인데, 각각으로 본다면 변이요 생멸인 듯이 겉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즉 도(공)가 명(색)이라는 이야기다.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똑 같은 말이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다.
즉 “도가 도이려면 늘 도이면 아니 된다”는 말은 도는 명으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명이 명이려면 늘 명이면 아니 된다”는 말은 명이 존재하려면 본질인 도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즉 도와 명은 다른 모습인 듯 하나 같다는 말이 된다.
금강경처럼 해석을 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된다.
“도가 도이려면 늘 도이면 아니 된다”는 A(A)는 A(B)가 아니기 때문에 이름을 A(C)라고 한다.........에 대비하여도 된다.
즉 도는 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름 하길 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도(도라고 이름 지어서 말하는 것은)는 도가 아니기 때문에(도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실상이 있기 때문에) 이름 하여 도라고 한다(현상적으로 할 수 없이 이름 지어서 도라고 한다).
“현상이 현상이려면 늘 현상이면 아니 된다”는
현상은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을 현상이라고 한다.
현상은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실상이라는 본질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현상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즉 붓다가 금강경에서 말하는 문장의 구조와 같다는 것이다. 뜻이 같음은 물론이다.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이름이 없는 것은 하늘과 땅의 시작(비롯함)이요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다.
무명이 바로 도(공)이다. 유명이 바로 명(색)이다.
이름은 없으나 그러한 본질이 분명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명 또한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이름 지을 수 없으나 분명 있는 도(공)가 있으므로 명(색)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 지을 수 없는 도(공)가 천지의 비롯함이요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비로서 유명(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즉 현상이 생겼다는 것이다.)이 있게 되며 이러한 유명이 만물(만색)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故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요
그러므로 항상 무욕이면 그 묘함을 볼것이요, 항상 유욕이면 그 가장자리를 볼 것이다.
“요”자는 “가장자리 요”이다.
즉 금강경의 “탐”을 생각해 보면 된다. 무욕이란 무탐이다.
붓다는 갈애(탐)의 소멸이 해탈이라고 직설법으로 이야기 하였다.
즉 무탐이면 그 묘함을 볼 것이라는 이야기는 현상의 본질을 볼 것이라는 이야기다.
유탐이면 현상의 가장자리 즉 겉모습을 볼 것이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색의 겉모습에 빠져있다. 그러므로 본질을 모른다. 그리하여서 금강경의 앞 장들에서 색성향미촉법으로부터 마음을 거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상의 겉모습에 속지 말라는 이야기다.
또는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대목도 앞에서 나왔다.
그와 온전히 같은 내용의 문장이다.
무탐이면 색의 겉모습에 빠지지 아니한다. 즉 상(겉모습)을 진실한 상(모습)으로 보지 아니 한다. 그 가장자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본질이 되어서 본질인 상태로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관기묘”이다. 여기에 “관”은 앞서서 말하였듯이 “볼 관”이 아니고 “봄”이다.
즉 “관삼매”이다. “봄”자체에 있기 때문에 즉 온전히 하나, 온전한 편재에 있기에 그 묘함 자체에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무심삼매를 크게 두 가지로 본다면
텅빈삼매와 외연삼매로 불 수 있다.
텅빈삼매에서는 나도 현상도 모두 초월한다.
그러므로 현상을 인식할 수가 없다.
헌데 노자는 지금 "관기묘"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말은 현상이 모두 드러났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공삼매가 되고나서 다시 색으로 돌아와서 무심삼매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색즉시공이 되어보고 다시 공즉시"색"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외연삼매가 아니고 "관삼매"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제상비상 즉견여래에서의 완전한 비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하기에 노자는 도=명 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도삼매를 이루고는 명삼매를 이룬 것이다.
즉 명즉시도를 이루고 도즉시명을 이루고 그것의 궁극인 관삼매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쌍차와 쌍조로 이야기 해본다면 쌍차하고 쌍조하고나서 차조동시가 된 것이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이 양자는 같은 것이다. 표현되면(나타나면) 다른 이름이 된다.
이 양자는 같은 것이다..........라는 대목은 도와 명이 같다는 것이다. 무명 유명이 같다는 것이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색=공 공=색 이다.
헌데 표현상으론 두 가지의 이름을 갖게 된다.
마치 실상 현상처럼 말이다.
또는 불일불이(不一不異)처럼 보아도 된다.
하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다.
하나인데 왜 하나가 아니냐고 하면 불생불멸과 생멸, 불변과 변에서 보듯이 분명 하나인데 두 가지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또는 위에서 보듯이 “도=명” “무명=유명” “공=색”이라고 분명히 말하여 졌다.
양자는 같은 것이라고 말하여 졌음에도 불구하고 쓰여진 글은 즉 표현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즉 “도=명”임에도 불구하고 “도”와 “명”자는 단어가 다르게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동위지현이란 “같은 것을 가리켜 현이라고 한다.”이다.
즉 노자가 도덕경 1장 이후에 많이 나오는 단어인 “현”을 정의한 것이다.
즉 노자는 “현”이라는 단어를 “같은 것”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무엇이 같은가? 위에서 이미 노자가 양자는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무엇이 양자인가? “도 와 명” “무명 과 유명” 이 둘이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즉 “공 과 색”이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둘이 같은 것을 가리켜서 “현”이라고 정의 하였다.
즉 앞으로 “현”이라는 단어를 쓸 때에는 “도 와 명” “무명 과 유명” “공 과 색”이 같은 것이라는 뜻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헌데 왜 “현”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현이란 “가물 현”이다. 즉 공과 색이 같다는 이치가 “가물 가물한 이치”라는 것이다.
설마 공 과 색이 같다는 것은 알기가 쉽지 아니한 이치라는 것이다.
지금이야 열역학 제 1 법칙에서 과학이 증명하고 있으며 또한 아인슈타인이 질량=에너지라고 하여서 무와 유가 같은 것임을 말하였으나 그 때로서는 이해하기가 가물가물한 것이었을 것이다.
또한 무심삼매에 들 때에 즉 위에서 “관기묘”가 될 때에 가물가물하여지며 들어간다. 즉 처음 무심삼매인 텅빈삼매에 들 때에 “가물 가물 또는 아득하여지면서” 본성 상태가 된다.
그러한 본성상태가 바로 색즉시공인 것이다.
그러므로 “동위지현”의 제 1번뜻은 당연히 도=명, 무명=유명이며 나머지 중의적인 뜻은 위에 쓴 것과 같다.
“현지우현”은 가물고 또 가물다는 뜻이다.
허나 앞에서 노자는 “현”이란 도=명이라고 이미 밝혔다.
그러므로 “도는 명이며 또한 도는 명이다”라는 뜻이다.
“그러하고 또한 그러하다”는 강조법이 있는 것이다.
사실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또는 “도는 명이고 또한 도는 명이다”라는 말을 조금 뒤집어 보면 “도는 명이고 또한 명은 도이다”라는 말이 된다.
즉 “색은 공이고 또한 공은 색이다”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온전히 같은 뜻이 된다.
중묘지문은 모든 묘한 것의 문이라는 뜻이다.
이 “묘”는 이미 위에서 밝혔다. 즉 “관기묘”에서 밝힌 것이다.
어떤 종교 어떤 공부를 막론하고 “현”만이 중묘지문이라고 밝힌 것이다.
즉 최고의 이치는 “현”이라고 말한 것이다.
즉 모든 중묘지문은 현이며 이것은 “도가 명이며, 명이 도이다”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귀결점은 이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노자가 천명한 것이 바로 중묘지문이다.
즉 모든 종교는 결국 “현(도와 명이 하나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