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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8-26 18:24
길을 찾아서 1.2.3.4.5(계속됨)
 글쓴이 : 밀행
조회 : 2,532  
 

길을 찾아서


우리 앞에 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길이란 어떤 길이든지 가야만 하는 運行의 묘가 있습니다.

그것을 도라고 하기도 하고 인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길을 걷다보면 자신이 가야할 길이 아님을 알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보이는 길 보다는 앞길을 모르는 것이 중생들의 삶입니다.

하지만, 이정표가 있다면 바로 찾아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정표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지기까지 왜곡된 부분이 많긴 하지만 그 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출가정신은 대승, 소승을 가릴 것 없이 통용될 수 있는 승가의 덕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의식을 갖게된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 길을 잃었다는 명료한 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어떤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은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고 본래의 목적과 길을 가고자 하는 의도를 상실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찾으려 한다거나 얻으려고 길을 가다가 길을 잃는다면 왔던 길을 되돌아와서 점검하여 다시 출발하게 되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출발할 때의 가고자 했던 길의 목적의식을 잃었다면 길을 갈 필요가 없으며 다른 길을 선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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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이익되는 결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길을 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죠.

한국불교는 아주 잘 굴러가고 있나요?

여기서는 개인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승려도 욕망이 있는 중생이기에 때론, 그 욕망이 승가보다 앞서는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집단 전체가 “대중이 합의하면 소도 때려잡는다는” 식의 악습을 그냥 놔둔다는 것은 구성일원의 도리가 아니며 수행자의 도리도 아닌 것입니다.

그럼 한국불교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21세기의 흐름을 자본주의 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정보통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앨빈 토플러같은 경제학자의 추측일 뿐이며 그 논리는 모든 삶과 흐름에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자본주의라는 환금시대가 모든 것에 작용한다고 해서 그 논리에 항복해서 되겠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상이 자본주의에 굴복당하는 것은 개인의 수치며 불교에 대한 모욕인 것입니다.

한국에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불교는 160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속에서 한국민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며 진행되어온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체계를 가진 종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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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이념이나 기독교 사상이 있지만 실상 현실 참여적 문제를 배제한 사상적 측면으로 보자면 부처님의 사상에 감히 어떤 종교도 명함을 내밀 수 없는 경지가 있다는 것은 불자 여러분이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한국불교가 왜 길을 잘못가고 있는지 중증의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아프다는 소리를 변변히 내지 못하는지 밝혀내고자 합니다.

저는 여기서 개인적 문제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근본적인 환부를 보이려는 것이기에 부득이 개인사유에 의한 문제제기가 있더라도 그것을 한국불교의 전체적인 사항, 한국종교의 문제로 인식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이런 데쉬를 하게 되면 저에게 많은 공격과 칭찬이 돌아오리라는 것을 잘 알며 이제 절집에서 살지 못한다는 위기감도 있지마는 목숨 걸어놓지 않고서는 해결할 길이 없는 이 난국을 모른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의사는 아니지만 한국불교가 환자인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는 불교도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부 기독교 측에서 저의 이런 행동을 악 이용할지 모르며, 온 몸을 다 바쳐서 포교일선에 나서고 계신 원력보살님께는(승가 재가 구분 없이) 죄송함을 감출 수 없는 점을 밝히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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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붓다의 제자로서 화합이라는 두루뭉술한 덕목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심각성과 승려詩人의 양심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울러 저를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밀행이라는 승려로서 조계종에 몸담고 있다가 80년대 불교운동 시기 이후 태고종 승적을 취득하게 되였는데 그 배경에는 엄청난 충격적인 사실이 내포 되여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1. 한국불교는 비민주적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너무 독단적인 표현이라 지나치다 할지 모르겠으나 사찰에서의 방식은 公儀를 상실한지 오래다.

대중공사는 본사 급 큰 절에만 해당될 뿐 말사에서는 공적기능이 전혀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말사 주지가 대중공사를 한다고 식구를 모아봤자 스님은 2,3명에 불과하고 대중공사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주지 측근의 공양주나 사무장 아니면 속가와 연관된 사람들을 앉혀놓고 대중공사를 한다고 하는 어이없는 풍경을 연출하는 실정이다. (가평 현등사에서 있었던 일)

내가 출가할 무렵만 해도 주지가 대중의 뜻을 헤아리는 풍토였으나 이제는 대중이 주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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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는 전권을 휘두를 수 있으며, 기도스님이나 방을 얻어사는 스님이 분명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인연이 다했으니 나가달라”(요즘은 인연이 다했다는 말도 잘 쓰지 않는다. 그냥 다른데 가서 살라고 한다.)는 말 한 마디에 칼로 베어진 무우 토막처럼 기도소임을 살고 있는 스님은 보퉁이를 싸야한다.

사람 사이에는 늘 갈등이 있게 마련이고 타인의 모든 행동이 자신의 마음에 흡족할 수는 결코 없다.

인생이 나그네 길이고 삶이 여정이라고 하지만 누구나 깃들곳을 원하며 때론 쉬어가고 싶기도 한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개개인 스님의 성향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요즈음은 미리

예고를 하는 게 아니라 미리 기도스님을 구해놓고는 전날 나가라고 통보를 하는 주지 스님도 있다고 한다.


例: 조계종 23교구 본사인 제주 관음사에서 교무인 유정스님은 기도스님이 쫏겨날 만한 사유가 없음에도 당장 걸망을 싸라고 했다.

그날 바로 빨래를 해서 방안에 걸어두고 있었는데 밤중에 짐을 싸라고 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유정스님은 180cm가 넘는 거구인데다 위압적인 자세로 욕을 하며 폭력을 휘두르려고 하였다.

동굴에서 허공기도(허공기도의 정확한 의미설정도 안되어 있는 -즉, 불상 앞에서가 아니면 모두 허공기도라는 발상인데 금강경 말씀의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 여래라는 말씀은 대체 어디다 적용해야 하는가? )한 것이 쫏겨날 이유라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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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끝나면서 신도들에게 간단히 들려주는 불교 상식이나 교리 끝에 묻어나오는 불교의 문제점을 말하였는데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그것을 관음사의 문제로 비화시켜서 기도스님을 내치게 되였다는 배경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구에게 문제 될 수 있는 여자문제, 공금횡령문제, 그리고 술 담배 피우는 문제(그는 담배, 술을 하기에 그것은 계율에 어긋난다고 생각지 않는 것 같다.)가 아닌 견해 차이로 빚어지는 갈등을 예고도 없이 쫏겨나야 하는 현실 속에는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어두운 메카니즘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일전에 평소에 알던 신도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자신이 다니던 절에 노스님이 갑자기 쫏겨나게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느냐고 묻자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신도 형편이 넉넉하면 모시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며 어디 가 계실만한 데가 없느냐고 물었다.

딱한 노릇이었다.

이런 일은 개인적인 마찰이기도 하지만 한국사찰이 직업화되어 가고 있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사회, 늙은 부모를 버리는 사회적인 현상이 절이라고 해서 일어나지 않을 리 없을 터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직업의 흐름이다.

나중에 직업화의 경향을 진단해 보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직업이란 생계를 위해 돈을 받고 노동력을 파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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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어쩌면 비효율적인(늙고 힘없는 대상이나 부분) 요소를 제거해야 직업을 능률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다는 요지는 직업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며 행동인 것이다.

기독교는 직업화되어 있다.

기독교의 출발은 세속에서부터 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에게 불교나 이슬람 같은 숭고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세속과 출세간은 不二 라고는 하지만 그 성격이 다르기에 쓰임새도 다른 것이다.

성직이라고 하는 것은 말 뿐이고 성전을 사고팔거나 목사직을 놓고 벌이는 쟁탈전, 목사가 신도회로부터 월급을 더 많이 타내기 위해 벌이는 충돌, 성전을 세운 당회장 목사 후임자리를 놓고 당회장 아들 목사와 신도회 측이 벌이는 암투 이런 행위들은 엄연히 세속적 이익을 앞둔 직업의 성향에서 오는 결과일 뿐이다.

그렇기에 직업이란 노동한 대가를 적절하게 받아내야 하는 입장은 

그 점은 한국불교의 직업화 부분에서 밝힐 것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또한, 주지임명에 관한 모순이나, 그 배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련다. 그 보다 중요한 사항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불교를 총체적으로 사부대중이라고 칭하지만 실상 2부중만 있다고 봐야하는 것이 솔직한 입장이겠다.

종회나 승려의 독단을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이 전무한 상황에서 스승과 사제, 그리고 본사에 소속되어 얽혀있는 이런 배경 속에서 개혁한다면 얼마나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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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의 개혁단체가 없어서 개혁을 못한단 말인가?



2. 한국불교는 논리를 세워야 한다.


禪의 不入文字는 군더더기 말을 싫어해서 一刀兩斷의 경향을 가진다.

그런 풍조로 인해 따지고 드는 것을 거부하는 풍토가 있다.

신문이나 언론이란 양심을 세우는 일이며 그로인해 서로를 경책하여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미에서 그 가치를 발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발행하는 불교 계통신문(다른 종교의 종교지도 마찬가지이다.)에 定論이 서있는가 살펴보라.

행사소개 위주나 아니면 법어와 불교교리에 대한 소개를 제외하고는 불교의 현장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면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것은 구독자가 사찰이기에 눈치를 봐야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흐름을 갖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

중국에 선불교가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선불교가 치열한 정신으로 무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있다.

덕산과 노파의 點心, 임제의 할 등, 중국 선종사에 남아있는 치열한 구도정신을 비롯하여 논쟁과 유학자들과의 목숨 걸은 싸움은 자기 내부에서 끊임없이 쌓아올린 부정의 거듭으로 인해 체득한 가치에서 우러나온 논리적인 행동양식에서 비롯됨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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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한국불교의 현실은 얼마나 치열하게 구도를 하고 있는가?

기독교인들이 우상숭배라고 비난하여도 그 문제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단호하게 표명하지 못하며 “타인의 종교를 비방하지 말라”는 식으로 대하고 만다.

하나님이라는 관념적 우상이 더 무서우며 왜 단하 천연선사가 목불 태운 이야기는 그저 옛 이야기로만 되 뇌이고 있는가?

그러므로 제주 관음사 유정처럼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우상에 덧칠을 하듯 두두 물물이 부처의 현현 아닌 것이 없다했는데 불상에 기도하지 않은 것은 부처님을 배신한 것이라는 둥 그래서 더욱 크게 절 짓고 더 큰 부처님 모시는 것이 불교의 주류 인냥 우상숭배의 비난을 면키 어려운 행위를 되풀이 하고 있는가.

큰 절로 보자면 중국 절의 웅장함을 따라갈 수가 없고 화려함으로 보자면 스리랑카나 태국의 금불상과 7보로 치장한 사원들을 따라갈 수 없으며, 오밀조밀함으로 보자면 일본의 사찰을 흉내 낼 수가 도저히 없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그것은 학문불교, 수행불교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한국 사찰들은 중국불교, 일본 불교, 스리랑카 불교를 흉내 내려 한다.

서울, 강남의 능인선원, 경기 와우정사, 부산 삼광사, 제주 약천사를 보면 그 극치를 엿볼 수 있다.

높이 더 높이 크게 더 크게의 구호처럼 대형 사찰, 대형 교회를 만드는 것이 지상의 최대 과제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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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교회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금물로 옷을 입혀 달라고 한 일도 없고 오히려, 그런 것들은 다 무상하니 心法을 따르라고 하셨다.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불사라는 것도 결국은 부처의 이름을 빌은 욕망의 다른 표현이며 발현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사회성이 약한 불교는 그렇게 치장함으로써 사회성을 만회해 보려고 하지만 그 설득력이 약하다.

사회성이 강한 기독교가 불교보다 수 십 배 사상적 측면이나 지도자의 모순을 함께 가지고 있음에도 성장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모순을 제거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기독교도이기 때문이다.

쉬쉬하지 말자. 쉬쉬는 아이 오줌 뉠 때 부르는 소리이다.

건전한 비판통로를 만들지 않으면 내부는 점점 곪아서 그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게 될 것이다.

이 세계를 구원하기에는 부처님 사상 외는 다른 대안이 없다하면서도 모순 된 불교의 모습으로 상처받는 중생들의 아픔을 생각해 보았는가?
불교 세미나가 열리는 줄 알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건전한 비판정신을 살리지 못하는 한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어찌 물이 썪어 있는데 그 물 속에 담긴 물질들이 깨끗하기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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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교의 직업화를 우려함

직업이란 노동력을 돈으로 바꿔서 그 대가를 통해 가족의 생활이나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수단을 말한다. 換金性을 가진 직업은 일정한 시간 속에 일이 즐겁던 고통스럽던 돈에 대한 대가를 노동력으로 지불해야 하는 숙명을 가진다.

불로소득을 가지는 일부계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땀과 정신적인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구조 속에 놓여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직업이 사회적 가치를 가지던 아니던 상관없이, 그 가치가 고매하던 저열하든 개의할 수 없다. 설령, 사기에 가까운 일이라 하더라도 그 대가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당부분을 투자하고 쏟아 부어야만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실정이다.

그 속에는 추잡한 일도 있고 때론, 의미 있는 내용도 포함될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종교란 모든 가치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지치고 삶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기대어야 할 보루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런 기대치 때문에 온갖 추악한 소문이 들려오는 종교일지라도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역할을 해주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더욱 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고도 모자라서 회복하기 어려울 상처자국을 남겨주는 것은 語不成說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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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종교가 없어져야 한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에 침식당하여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암적인 독소로 자라나는 비종교적인 환부는 도려내야 하지 않은가.

불교가 직업적으로 가고 있는 현상은 여기저기에서 잡혀온다.

직업이란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야 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시스템에 비효율적인 부분은 잘라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교의 근간이 무너진다는 것은 조금 후에 말하겠다.

요즈음 본사 급 사찰을 제외하고는 한주나 뒷방차지는 사라졌다. 아무 소임도 맡지 않고 마음공부를 하기란 사찰 구조상 어렵다. 소위 객실이 있던 절 들에서 객실은 사라졌다. 객이 오면 불편하고 귀찮고 돈이 나가기 때문인데, 객승만이 아니라 함께 사라는 스님의 구조도 최소한의 인원의 스님만 상주케 하는 구조로 가고 있는 것이다.


* 지리산의 법화사라고 하는 절은 법당이 80평정도 되고     보궁 까지 갖춘 규모가 큰 절이지만 스님이래야 기도스님하고 주지스님 단 둘뿐이었다. 주지스님은 항상 부산에 나가 있으니 스님 혼자 사는 셈이다.

물론, 공양주 보살이나 처사들이 여러 명 있긴 하다.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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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절의 가풍은 사라지고 없고 세속에서 함부로 지내던 습관에 길들여진 처사들은 술 마시고 함부로 행동하고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린다던지, 별것 아닌 일에 고함을 지르고 서로 간에 갈등으로 싸우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절인지 속가인지 모를 지경에 처해 있는 절이 상당수 있다.

스님들이 있어봤자(자신의 상좌 던 타 문중 스님이던 마찬가지이다. 상좌라고 말썽 부리지 않는가.) 돈만 들어가고 잘못 약점 잡히면 좋을 것 없으니 휴양객이나 받으면 돈이 나오니 사찰 운영에 쓰는 형태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불교가 무엇인지 깊이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자신의 처지에 따라 들어선 절 집에서 어떤 기준이 없이 행동할 수밖에 없다.

돈을 만지는 사무장이나(요즘은 과장이나 간사라는 호칭을 쓰는데 대체 절집이 회사인지 종교집단인지 알 수가 없다.)행정을 맡는 사람들의 입김이 세어지게 마련이고,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승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돈을 만지고 주지스님이나 그 절의 실권자와 자연 가까이 지내게 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악용하여 마치, 제 2인자나 되는 듯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절에 사는 스님은 그 사무장이나 과장에게 고용된 직원인지 아닌지 혼돈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많은 사찰에서 자행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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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주 관음사에는 주지스님이 일년에 몇 번 내려오고 거의 실권은 다른 스님이 잡고 있고 그 실권의 대행자가 바로 최 명주라는 이름을 가진 과장이다.

이 여자는 스님의 행동을 사사건건 제어하려 하고 심지어는 스님의 기도에 까지 월권을 한다. 기도에 앞서 신도카드를 보여주며 “이 신도는 기도비를 적게 냈으니 기도를 약하게 해도 된다”라는 말은 스님으로서는 상당히 모욕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다.

기도가 많이 밀려 있어서 다음 신도를 위해 빨리 끝내라고 하는 것이 아닌 기도비가 적으니 기도를 짧게 하라는 말은 도저히 상식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언사인 것이다.

기도란 부처님과 만나는 행위이며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도 삼매에 들어야 하는데 기도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온갖 잡생각이 깨끗한 마음 상태로 바뀌고 그 상태의 몰입이 일정기간은 지속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저도 단 한번의 삼매에 잠간 들어간 일이 있는데 그것은 극히 짧은 시간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백 천 삼매를 경험하기에는 까마득한 일이 아닌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에 들기까지 소음이나 걸리적거리는 행동에서 자유로워야 함은 자명한 수순이다.

그런데 기도에 앞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그것도 법당안 탁자 앞에서- 기도시간에 법당에서 떠들거나 말하는 것도 부처님을 초청하는 자리에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이미 기도몰입 상태를 방해한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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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월 보시를 과장이라는 여자가 스님에게 주다보니 마치, 자기 부하 직원에게 하듯 착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교무스님에게 직접 주었으면 하고 부탁 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출가의지를 살리기 어렵고 부처님의 제자라는 자긍심은 찾기 어렵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대처스님들을 제외하고 기도스님이 상주하는 절을 따지자면 전국으로 따지면 천 여 사찰 정도는 어림짐작 될 것이다.

그 많은 스님들 중에는 주지스님의 상좌이거나 사제인 경우를 제외한 스님들이 대부분이다. 그 스님들은 포교 원력을 가졌다 해도 자신이 중책이나 주지 직을 맡지 못하면 큰 원력이라 하드라도 성취할 수 없다. 아예,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을 표명하는 것도 주지승에게는 눈에 가시가 될 수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돈을 모아서 포교당이라도 차리든지, 재력있는 신도에 의해 절을 지어서 보시 받거나, 그것도 아니면 본사에서 처세를 잘하여 공찰의 주지로 나가든지 해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방법이 있지만 공찰의 주지로 나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처세도 잘해야 하지만 본사에서의 입지도 있어야 하며, 주지로 부임하드라도 전별금이 없으면 주지로 들어가기가 어렵다.

처세를 잘 하는 것이 마치, 수행을 잘하는 것인 냥 비춰지지 현실이다. 물론, 처세이든 어떤 행동이든 마음에서 작용하는 것이지만 그 초점은 분명 다르다. 목적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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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마다 불사다 뭐다해서 공사가 많고 하다보니 선불로 공사를 하게 되고 뒤처리는 후임주지가 맡게 되는 것이 관례로 내려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공사대금은 후임주지에게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돈이 없는 스님은 신도나 속가에서 돈을 끌어 쓰게 마련이고 그 돈을 갚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며 마음은 어떻게